기억 속 작은 방 그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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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 기억 속 작은 방 그 고양이
조회3,118회   댓글0건   작성일2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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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기억 속 작은 방 그 고양이

 

나만 없어, 고양이. 어느 날 친구가 뜬금없이 진지하게 보내온 문자 한 통에 웃음이 터졌다. 너도 없니, 나도 없어. 요새 고양이가 대세이긴 대세구나. 간택 받고 싶다.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기억 저 너머 내 안의 작은 방들 사이에 숨어 있었던 무언가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보들보들, 사뿐사뿐, 살랑살랑. 커다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아. 그렇구나. 나에게도 있었다,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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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어딘가를 들춰보면


꽤 오래전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의 나는 방학 때는 물론이고 주말에도 자주 외할머니 댁에서 시간을 보냈다. 거리가 가까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여동생 둘을 이끌고 굳이 집을 떠나기를 자처했던 것은 할머니 댁이 그야말로 최상의 놀이터였기 때문이었다. 2층짜리 단독주택인 외할머니 댁은 아파트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과 달리 원목나무결이 살아있었고 밟으면 삐걱거리며 우는 소리를 냈다. 나와 동생들은 다락방에 몰래 숨어들어서 오래된 짐짝들에 기대어 실뜨기를 하거나, 어렵고 두꺼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토끼그림 따위를 그리며 놀았다. 커다란 감나무가 드리워진 앞마당에서는 호스로 물을 뿌리며 촉촉한 풀냄새를 맡기도 했다. 그러다 몸이 차가워지면 뒷마당의 장독대들 위에 널려 있는 시래기를 가지고 소꿉장난을 치면서 햇볕 내음을 맡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은 단연 어두운 지하창고였다. 습한 공기와 낮게 깔린 먼지들, 드문드문 발견되는 이름 모를 벌레. 어린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래서 지하창고는 그 어떤 장소보다 더 신비로웠다. 기억 속의 그 고양이를 처음 만난 곳도 바로 거기였다. 거미줄이 낀 미싱이나 비닐로 꽁꽁 싸맨 안락의자를 넘어 다니며 여느 때처럼 즐거운 탐험을 계속하던 중에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자리에 얼어붙은 나와 여동생들은 서로 눈만 마주치다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창고 밖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쳤다. 그렇게 빠져 나와서는 창고 문 앞에 다닥다닥 붙어 안을 슬며시 들여다봤다. 근데 저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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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반하다

 

솜뭉치같이 보드랍게 일어난 털, 내딛을까 말까 허공에 들린 앞 발, 우리를 보고 휘둥그레진 눈동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고양이잖아! 여기 왜 있지? 언니, 나 무서워... 이쪽이 소란스러운 사이, 고양이는 슬그머니 창고 짐 사이에 몸을 감추고 머리를 반만 내밀고서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어두운 창고 안에서도 하얀색 털이 선명하게 보였다. 섬세하게 곧게 뻗은 수염, 동그란 앞가슴, 적당히 탄탄하게 발달된 뒷다리 근육. 그저 쪼그리고 앉아 있을 뿐인데 그것마저 기품 있게 느껴지는 존재는 이 세상에 오직 고양이뿐일 것이다. 나는 창고 문에 달라붙어 오랫동안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에 쓰는 거였다. 동생들도 반짝반짝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동물이라면 보기만 하면 달려드는 옆집의 백구밖에 몰랐던 나에게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내려온 듯한 흰 고양이의 존재감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 후로는 예상하는 대로다. 본격적인 고양이 탐구생활의 시작이었다. 나는 외할머니가 잘 안 입는 낡은 모직치마를, 여동생들은 먹다 남은 생선구이나 국을 우리고 버리려던 마른 멸치들을 몰래몰래 챙겨들고 고양이에게 가져다주었다. 따뜻하라고, 배부르라고 어린애들 나름의 배려라는 걸 한 셈이었다. 우리만의 비밀. 그렇게 생각하니 지하창고 계단을 내려가는 음산한 그 길이 그렇게 두근두근 설레고 신날 수가 없었다. 뇌물을 몇 번 갖다 바치고 나서야, 지하창고의 고양이는 우리가 좁은 창고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머리를 싸매고 이름을 정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하양이’라는 이름도 생겼다. 하양이는 부산스러운 우리들을 앞에 두고 멀찌감치 앉아서 태연하게 제 몸만 부지런히 핥다가 숨다가, 핥다가 졸다가 하는 행동을 반복했다. 우리는 그냥 그걸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기억 너머의 저편으로


오랫동안 드나들었던 애란다. 새끼도 여럿 낳았지. 나중에 외할머니께 진상을 전해 듣고 하양이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어 버렸을 때, 이유 모를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새끼 고양이라는 온 몸에 귀여움이 꿈틀대는 듯 한 단어에 전율했던 것을 기억한다. 하양이는 점차 우리 앞에서 배를 보이고 눕거나 말 그대로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옴 몸을 배배 꼬며 늘어지게 잠을 자기도 했다. 우리는 기세가 등등해졌다. 만천하에 그 존재가 공개가 되었으니 당당하게 ‘지하창고에 다녀오겠다’는 말도 할 수 있었다. 학교 친구들, 학원 선생님, 소아과 간호사 언니에게 ‘저 고양이 키워요’라는 말도 서슴없이 했다. 머리를 만져주면 정말 골골송을 부르냐는 질문에는 안타깝게도 대답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헤어짐은 급작스러웠다. 어느 날 갑자기 하양이는 더 이상 지하창고에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슬프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길고양이 주제에 보송하니 하얀 털을 자랑하던 그 굽은 등을 한 번 쓸어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는 했다. 포슬포슬 따뜻한 온기를 한번 쯤 나누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만 반드시 닿아야만 관계가 맺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오늘 날 어른이 된 나는 알고 있다. 어쩌면 외출냥이였을까. 누군가가 데려다 돌봐 주기로 한 걸까. 나쁜 생각은 하지 않을 거다. 하양이는 너무나도 곱고 예쁜 내 첫 고양이였으니까. 

 

 

CREDIT

장수연

그림 지오니

 

 

본 기사는 <매거진C>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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