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 맑고 반짝이는 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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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슬, 맑고 반짝이는 강물처럼
조회873회   댓글0건   작성일4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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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며 만나다 

윤슬, 맑고 반짝이는 강물처럼 

 

상처는 사랑의 크기에 비례한다. 사랑했던 만큼, 믿었던 만큼 깊이 파인다. 그 깊이만큼이나 아무는 데 필요한 시간도 길다. 윤슬이에는 끔찍한 기억이 아주 많은가 보다. 내게 온 지 1년 반이 지났지만 아직도 무서운 것이 많고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다. 다행인 건 조금씩이나마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중이라는 것. 기적 같은 작은 변화들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심쟁이 윤슬이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첫 발을 내딛었다. 처음 해보는 것투성이의 첫 여행! 새로운 추억들이 나쁜 기억을 잠식시키고, 윤슬이 안에 차곡차곡 쌓여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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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와 편안함 모두 잡는 글램핑 


정확히 1년이 흘렀다. 무릎 위의 누렁이 남실이와 여행을 떠난 지도. 알고 있는 걸까. 날 쳐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찜통 더위에도 무릎에서 버티는 것이 시위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마감이 코앞인 작업들을 잠시 뒤로하고, 남실이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우선순위가 뒤섞이지 않도록 가끔 이렇게 정리가 필요한 법이니까. 유난히 푹푹 찌는 올해 여름,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에는 계곡 물에 발 담그고 수박 먹는 것이 최고다. 떠나자! 맑은 물과 푸름이 넘실거리는 홍천으로! 올해 휴가는 윤슬이도 함께다. 

 

윤슬이는 하얗고 포실포실한 말티즈다. 말티즈 특유의 앙칼짐은커녕 겁이 많고 낯을 많이 가린다. 처음에는 산책도 불가능 할 정도여서 어디를 데리고 다닐 엄두를 못 냈지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늘 간절했다. 이제 제법 산책도 좋아하고 잘 뛰어다니지만, 여전히 바깥이 무서운 윤슬이를 위해 여유로운 힐링 여행으로 결정했다. 고민 끝에 선택한 글램핑. 화려하다(glamourous)와 캠핑(camping)이 합쳐진 단어로, 장비 부담감은 줄여주면서 자연과 함께하는 캠핑 분위기는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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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친한 선배와 친구가 동행했다. 이맘때 날을 잡으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장마’ 님도 왔다. 비가 온다고 못 즐기면 그건 여행이 아니다. 강아지 한 마리씩 무릎 위에 놓고 캔맥주와 낮잠, 무한 수다를 풀었다. 텐트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구워먹는 바비큐는 운치와 맛,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다. 한우를 맛 본 남실이가 돼지 목살을 거부하는 통에 모두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비가 그친 새벽하늘은 맑았다. 별비를 보니 내일은 맑겠구나 하는 안도와 기대감이 들었다. 

 

 

반짝이는 길만 가길 


윤슬이는 강아지 공장 출신이다. 닭장 같은 케이지에 갇혀 기계처럼 새끼를 낳던 모견이었다. “돈 많이 벌어다 줬겠네.” 처음 구조해 나왔을 때 혀를 끌끌 차던 수의사의 말이다. 2킬로의 작은 몸집과 예쁜 얼굴은 인간의 이기심에 무참히 이용당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비참한 생활을 떠돌았을지는 알 수 없다. 마지막 번식장에서 보낸 시간만 3년, 더 이상 새끼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어서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직 새끼라 해도 믿을 만큼 동안이지만 추정 나이는 이미 10살 이상이다. 이빨은 거의 없고 목욕시킬 때면 피부에서 나이가 보여 가슴이 아프다. 구조해서 나오자마자 패드에 배변을 가렸다. 한때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던 가족이었다는 증거다. 그 사람은 알고 있을까. 자신의 무책임함이 한 생명의 삶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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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에는 나 외의 사람이 안으려고 하면 똥오줌을 지렸다.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눈을 질끈 감고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쭉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체념과 포기 속 아픈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견디면서. 신기하게도 내게는 어떤 경계심도 없이 무장해제다. 둘만 있을 때면 애교가 어찌나 많은지 얼굴이 뽀뽀로 뒤덮일 정도다. 언제쯤이면 마음의 빗장을 다 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진짜 모습을 발산하게 될까. 요즘은 남동생에게 먼저 다가가 만져달라고 깡깡 짖어대기도 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윤슬이는 오늘도 조금씩, 조심스럽게 마음을 여는 중이다.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물결을 뜻하는 순수 한글이다. 언젠가 딸을 낳으면 지어주고 싶은 이름으로 몇 년 동안 가슴 속에 숨겨왔던 단어다. 하얗고 조그마한 존재를 처음 품에 안는 순간 알았다. “안녕, 윤슬아.” 이름처럼 빛나는 삶만 앞에 놓아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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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세상, 네게는 우주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윤슬이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물론 남실이를 달래주는 것도). 차가운 철장과 주사, 자신을 아프게 하는 손으로 가득했던 윤슬이의 세계는 이제 가족, 집, 분홍색 쿠션, 매일 산책하는 공원으로 늘어났다. 내가 보여주는 작은 세상이 남실이와 윤슬이에게는 세상의 전부인 만큼 계속해서 아름다운 자연과 따뜻한 손길로 채워주고 싶다. 

 

별들이 귀띔해준 것처럼 다음 날은 화창했다. 홍천강 배바위 근처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물속에서 남실이와 윤슬이를 불렀다. 수영을 무서워해 일찌감치 도망간 남실이와는 달리 윤슬이는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다가왔다. 처음 경험해보는 미끄러운 자갈과 차가운 강물에 눈은 더욱 동그래지고 몸짓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신기한지 물을 할짝거려 본다. 

 

낯섦이 그렇게 두렵지만 않은 것을 깨달은 것일까. 눈치만 보던 윤슬이는 남실이와 우다다 장난도 치고,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돌아오는 차안에선 더 이상 떨며 보채지 않았다. 코를 골며 떡실신했다는 건 안 비밀이지만. 현재 온도 33도. 후덥지근한 방에서 미지근한 선풍기 바람을 공유하고 있는 남실이와 윤슬이는 그날의 시원한 강가 꿈을 꾸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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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박애진 ​| 여행작가

사진 유정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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