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진룬의 TNR 고양이 노트

칼럼 전문가에게 듣는 동물 이야기
리진룬의 TNR 고양이 노트
조회 1281   2년전
고경원 길고양이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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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여행자의 일상여행기                      

#008 리진룬의 TNR 고양이 노트

 

고등학생 시절 입시미술 학원에 다닐 때만 해도 사진처럼 잘 그린 그림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땐 누가 서너 시간 안에 석고상을 가장 그럴듯하게 묘사하는가로 우열을 가리던 때였으니까. 미술대학에 들어가고 입시미술이 아닌 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알게 됐다. ‘잘 그린 그림’이 꼭 좋은 그림과 같은 의미가 될 수는 없다는 걸. 대상을 똑같이 그려내는 건 오히려 어렵지 않은데, 힘 빼고 대충 그린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린 이의 개성을 담은 그림을 그리는 게 더 어려웠다. 그래서 느슨한 그림체의 작가들을 보면 눈길이 간다.

 

타이완의 그림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유명한 리진룬(李瑾倫)의 그림이 그렇다. 한국에도 그의 책이 딱 한 권 번역되어 나왔는데, 2003년 출간된 그림동화 <동물병원 39호>라는 책이다. 색연필로 쓱쓱 그린 듯한 그림을 보면 ‘어쩌면 이렇게 쉽게 그렸지?’ 싶은데, 계속 보노라면 결코 쉽지 않은 그림임을 알겠다. 아프고 병들거나 때론 버려진 동물들 이야기를 꼭 슬프지만 않게, 유머를 담아 그려낸 작가의 배경이 궁금했는데,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기에 동물들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동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자연스럽게 길고양이에 대한 마음으로 이어져, 작업실 근처 길고양이에게도 밥을 주고 길고양이 TNR을 알리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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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진룬 공작실을 지키는 고양이 해피. 해피를 모델로 한 에코백도 판매되고 있다.

 

 

타이완 제2의 수도로 불리는 가오슝에 들른 목적 중 하나도 그림책 작가 리진룬의 작업실인 ‘리진룬 공작실’을 가보는 것이었다. 전철역에서 15분쯤 걸어 주택가로 들어섰을 때 길고양이 두어 마리가 어슬렁거리는 작은 가게가 보였다. 화단 한쪽에 길고양이 밥그릇이 놓여 있고 쇼윈도 너머로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놓여 있는 걸 보아 제대로 찾아온 듯했다. 아기자기한 동물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리진룬 공작실은 개미지옥 같은 곳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만큼 빠져나오기 힘든 매력이 있다는 뜻이다. 원래는 촬영 허가를 받고 잠깐 스케치만 한 뒤에 다음 장소로 이동할 생각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한 시간 넘게 머물렀다.

 

직접 만든 고양이 독립출판물과 아트상품을 판매하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스터디도 하는 고양이 책방을 꿈꾸는 내게, 리진룬공작실은 한국에도 하나쯤 있었으면 싶은 꿈의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작가가 디자인한 문구류와 소품 외에도 직접 그린 그림책과 엽서, 그의 일러스트가 들어간 음반도 판매한다. 운이 좋다면 작가가 키우는 젖소무늬 고양이 ‘해피’가 평대 위에 덜렁 드러누워 장난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벽에 걸린 에코백에서 둥글둥글한 해피의 초상화를 찾아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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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귀 끝이 커팅된 TNR고양이를 상징하는 리진룬의 고양이 노트. 

 

 

그가 만든 ‘작품’ 중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TNR 고양이 노트였다. 노트 전면을 고양이 얼굴이 가득 채우고 있고, 노트 모서리 양 끝에는 고양이 귀가 그려져 있는데 한쪽이 45도로 짧게 잘려 있다. 길고양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TNR 표식을 떠올리게 될 것이고,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TNR이 무엇인지 한눈에 설명할 수 있는 제품이다. 노트를 사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길고양이의 현실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길고양이에 대한 메시지를 담으면서도 진부하지 않게 표현하는 일, 그림책 작가 리진룬이 내게 던져준 과제가 아닌가 싶다.

 

 

CREDIT

글·사진 고경원

 

 

본 기사는 <매거진C>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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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소개

고경원 길고양이 통신
2002년부터 길고양이의 삶을 사진과 글로 전하면서 출판, 전시, 강연을 통해 고양이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블로그 ‘길고양이 통신’(catstory.kr)에서 다양한 지역의 고양이 여행기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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