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거대정원, 제주 성산일출봉

칼럼 전문가에게 듣는 동물 이야기
고양이의 거대정원, 제주 성산일출봉
조회 1098   1년전
고경원 길고양이 통신


고양이 여행자의 일상여행기                      

#022 고양이의 거대정원, 제주 성산일출봉

 

어머니와 함께 떠나는 고양이 여행은 여느 때와 조금 다른 일정을 짠다. 나야 비탈길을 오르내리든, 골목을 헤매든 ‘원래 고양이 여행이란 그렇겠거니’ 하지만, 칠순 되신 어머니에게까지 난코스를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여행을 기념할 사진도 충분히 찍고 최대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를 골라본다. 고양이와 만난다면 더없이 좋지만, 못 만나더라도 자연을 즐길 수 있어 좋은 여행. 제주에선 그런 느슨한 여행이 가능했다.

 

성산일출봉 입구 안내문에는 정상까지 왕복 50분이 걸린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계단이 시작되면 비탈길을 계속 오르는 것이 만만치 않을 듯했다. 서둘러 정상에 오르느라 체력을 소진할 것 없이 천천히 가자 생각하며 걷는데, 저 멀리 꼬물꼬물 움직이는 하얀 점이 보였다. ‘혹시 고양이인가?’ 싶어 망원렌즈로 당겨보니 하얀 바탕에 까맣고 노란 무늬가 점점이 박힌 예쁜 삼색이였다. 수풀 속에서 조그만 곤충이라도 발견한 걸까. 사냥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나도 고양이의 마음이 되어 몸을 낮추고 삼색이에게 살금살금 다가간다. 하지만 몇 걸음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녀석은 사냥감을 따라 풀숲으로 폴짝 뛰어들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여행의 시작부터 고양이라니, 왠지 좋은 징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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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성산일출봉에서 만난 행운의 삼색고양이. 잠시 얼굴을 비추고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일출봉을 오르는 어머니를 따라 부지런히 계단을 오르는데 노랑얼룩이가 불쑥 나타났다. 나와 딱 계단에서 마주치고 불안한지 우왕좌왕하는 눈치더니, 계단 가장자리를 따라 달아난다. 역시 고양이 입장에서도 등산하며 도망가기보다는 하산하는 쪽이 편한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일출봉 정상까지 가보겠다며 걸음을 옮기는데, 고양이는 아래로 내려가는 상황. 어머니를 따를 것인가 고양이를 따를 것인가.

 

결국 잠시 고민하다 고양이를 따라가기로 했다. 종종걸음으로 달아나던 녀석은 일출봉을 등지고 수풀 속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 왕래가 많은 계단에서는 낯가림을 하더니, 안식처에 머물 때는 나를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제법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달아날 기색이 없다. 이럴 때는 나도 모른 척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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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봉 정상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등지고 하산하는 노랑둥이 길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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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풀 방석이 푹신하게 깔린 안식처에서 나를 보는 눈빛이 “내 집에서 왜 안 나가고 있냐?”하고 따지는 것 같다.


녀석이 앉은 자리를 보니 그곳을 편안하게 여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른 쪽은 푸른 풀이 뻣뻣하게 자라 깔고 앉으면 뱃가죽이 따갑지만, 마른풀이 깔린 이 자리는 이미 몇 번 깔고 앉은 자리여서 편안했던 것이다. 아마 일출봉 곳곳을 누비고 다니다가 마침 마른풀이 쌓여 있는 명당자리를 발견하고 제 것으로 삼은 모양이다. 내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으니 멀뚱멀뚱 쳐다보기까지 하다가 급기야 단잠에 빠진다. 나를 기다리다 못한 어머니가 일출봉을 내려올 때까지도 녀석은 식빵을 구우며 졸고 있었다. 우리 모녀가 자기에게 위협이 안 되는 사람들인 걸 눈치로 알았을 것이다.

급히 고양이를 뒤따르느라 미처 꺼내지 못한 사료를 주섬주섬 꺼내어 풀어놓는다. 잠에서 깨어나면 녀석 곁에는 먹음직한 한 끼 식사가 놓여 있을 것이다. 눈 떴을 때 발견한 횡재에 길고양이는 ‘아직도 내가 꿈에서 깨지 않았나’ 하고 의아해할까. 다음엔 유채꽃 만발한 봄날에 다시 한 번 일출봉을 찾자고 어머니와 함께 약속했다. 그땐 녀석들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CREDIT

글·사진 고경원

 

 

본 기사는 <매거진C>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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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소개

고경원 길고양이 통신
2002년부터 길고양이의 삶을 사진과 글로 전하면서 출판, 전시, 강연을 통해 고양이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블로그 ‘길고양이 통신’(catstory.kr)에서 다양한 지역의 고양이 여행기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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