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겨울 한 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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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 나의 아름다운 겨울 한 모금
조회1,595회   댓글0건   작성일1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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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나의 아름다운

겨울 한 모금

 

날씨가 추우니 자연스레 뜨거운 홍차 생각이 났다. 그런데 부엌 찬장에는 늘 있던 붉은 차통이 없었다. 잠시 팔팔 끓는 주전자에 맺힌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카모마일 꽃잎을 말린 것, 유기농 고급 녹차, 코코아, 원두커피. 독서를 곁들인 티타임을 위해 한 달에 한두 번씩 사다 놓은 것들이 양이 줄지도 않고 그대로 있었다. 나는 내 머리통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는 찬장 문고리를 잡고 까치발을 들었다. 이것들에 밀려 저 깊숙이 홍차 통이 숨어 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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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두 마리의 푸들이 있다. 종종 오후의 햇살에 비유되기도 하는 홍차의 맑은 수색과 꼭 닮은 아름다운 갈색 털을 가진 아이들이다. 어미인 마론이는 갓 우려낸 얼 그레이에 신선한 우유가 섞여 드는 순간을 떠올리게 하고, 아들인 라떼는 오렌지 페코에 초콜릿 가향을 블렌딩한 발랄함을 지니고 있다. 모두 찻잎을 우리다 떠오른 이름들이어서 그리 되었다. 다소 편파적인 취향이 반영되었지만 각자의 성격과 외모를 썩 잘 표현해 주고 있기에 강아지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음 한편에 미약한 뿌듯함까지 느낄 정도다.

 

마론이와 라떼는 티타임을 즐거운 놀이시간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찻잔 밑에 어떤 레이스를 깔까 망설이며 서랍장을 열면 귀신 같이 알아채고 달려온다. 그리고는 오래된 천 조각들을 꺼내 들 때 떨어지는 쾌쾌한 먼지들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 걸 마치 눈 구경이라도 하듯이 코를 킁킁대며 맡는다. 찻잔을 식탁 위에 올려놓을 때의 달그락거리는 소리, 차통에서 찻잎을 덜어내는 티스푼의 반짝임, 팔팔팔 강하게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수증기. 그 모든 것을 까만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며 열심히 구경을 한다. 가끔 과일 향이 강한 홍차 팩을 뜯을 때면 앞발을 들고 서서 "뭐야, 뭐야? 무슨 향기가 이렇게 달콤해?"하며 꼭 확인하려 든다. 그 모습이 세 살 먹은 호기심 대마왕 어린애처럼 얼마나 귀여운지 결국 티백을 코끝에 한 번씩 대주고 향을 맡을 수 있게 해준다.

 

티타임을 준비할 때는 아이들의 간식거리 또한 함께 마련한다. 주로 잘게 찢은 닭고기나 씨를 제거한 사과, 배 등을 준비하는데 나 혼자 꽃송이가 그려진 우아한 찻잔을 사용하는 것이 머쓱하여 마론이와 라떼에게도 평소의 밥그릇이 아닌 작고 귀여운 사기종지에 예쁘게 담아내어 준다. 뜨거운 홍차를 호오호오 불어 겨우 두어 모금 마시고 나면 아이들은 이미 순식간에 간식을 먹어 치우고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턱 주변이 축축하게 젖어서는 내 손에 들려있는 홍차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따라 고개가 갸웃거리며 움직인다. 물음표가 가득 찬 얼굴. 왼쪽 오른쪽 멈출 줄 모르고 세차게 흔드는 꼬리. 마침 방금 마신 홍자가 입천장을 쓰다듬고 식도를 지나 부드럽게 심장 언저리를 데워준다. 아아, 나는 이 순간을 위하여 티타임을 가진다고 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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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조금 외로운 계절이라고 생각한다. 찬바람에 굴러가는 쪼그라든 음료수 캔, 이파리를 떠나보낸 나뭇가지, 평소보다 늦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이제 곧 아름다운 봄이 찾아올 것을 알면서도 지친 마음을 쉬이 다시 일으켜 세우기가 힘이 든다.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안온감은 의외로 우리 주변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존재다. 마론이와 라떼와 함께하는 티타임은 내가 찾아낸 단연 압도적인 따뜻함이었다. 이토록 본질에 가까운 평온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을까. 반짝반짝한 예쁜 소품들이 가득한 테이블 앞에 앉아 차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행복한데, 자꾸만 내 무릎을 긁으며 온갖 애교를 피우는 아이들을 못 이긴 척 안아 올리며 "요 녀석 들!" 단 한마디를 내뱉을 수 있는 기쁨까지 더해져 모든 것이 완벽해진다. 오르내리 던 감정의 기복에서 포록, 비로소 벗어나는 때다.

 

이제 나는 일주일에 한 두 번은 테이블을 그럴 듯하게 차려놓고 티타임을 즐기지 않으면 못 견디게 되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아침에서 오후로, 오후에서 저녁과 밤으로 강아지들의 털빛이 어떤 홍찻물 색으로 물드는지 잔잔히 확인할 수 있는 여유가 내 안에 절실하게 필요함을 깨달았다. 고무줄에 둘둘 말린 흑설탕 주머니, 아마도 유통기한이 지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애플티백. 그것들에 밀려 찬장 깊숙이 밀려들어갔을 붉은 차통을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보드라운 강아지들의 온기는 찬장 안을 들여다보려고 다시 까치발을 드는 나의 시린 발목을 담요보다 더 밀도 있게 덮어줄 것이다. 아름다운 겨울, 매일 밤 밀크티 한 모금 그 이상으로 따뜻하게.

 

 

CREDIT

장수연

그림 지오니

 

 

본 기사는 <매거진P>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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