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받은 은복이의 트라우마

칼럼 전문가에게 듣는 동물 이야기
학대받은 은복이의 트라우마
조회 770   3달전
손서영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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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은 은복이의 트라우마 

 

2016년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하지만 그 눈은 우리 가족에게 눈처럼 하얀 은복이라는 새 식구를 가져다주었다. 은복이는 주민들의 제보에 의해 알게 된 아이로 학대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그 집을 찾아가서 개를 살펴보니 개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서 집과 담벼락 사이에 끼어 있었다. 누구든 접근하면 부들부들 떨었으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주인이 잠이 드는 밤이 되어서야 그곳에서 빠져나와 조금 돌아다니곤 했다. 고민 끝에 주인이 불쾌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에게 입양을 보낼 것을 권유하였고 개가 귀찮았던 주인은 쉽게 승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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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던 날 나에게로 온 은복이가 눈밭을 뛰어다니고 있다)

 

 

그렇게 우리 집으로 오게 된 백구 ‘은복이’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지만 6개월 동안이나 남자를 무서워하였으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산책하러 가자고 하여도 따라나서지 않았다. 은복이의 마음을 꽁꽁 얼게 만든 상처는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이나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입양견을 키우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끊임없이 사랑을 주었을 때 그 보답으로 마음의 빗장을 풀고 천천히 다가오는 순간일 것이다. 은복이도 다행히 가족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치유되어 지금은 침대에서 마음껏 뒹굴며 사랑받는 것에 익숙한 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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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란 무엇일까? 의학용 사전에는 정신적 외상, 즉 영구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충격을 뜻한다. 다시 말해, 사고로 인한 외상이나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사고 당시와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불안해지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개도 사람처럼 트라우마를 겪을 수 있을까? 나의 경험에 의하면 그렇다. 은복이의 경우도 묶여있는 상태로 학대를 당했던 기억 때문에 묶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남자에 대한 공포심이 아직도 있다.

 

과학적으로도 이전의 경험이 장기적으로 동물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바이다.  동물의 경우 ‘각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새끼 거위가 태어날 당시 처음 보는 물체를 어미로 인식하고 그것을 따른다는 것은 가장 잘 알려진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개의 경우에도 3주에서 12주 사이가 가장 민감한 시기로 이때 일어나는 일렬의 사건이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심각한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던 동물의 경우, 그 이후에 받는 스트레스에 상대적으로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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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를 해칠 권한이 없어요.” 맞는 말이다. 누구도 타인을, 동물을, 자연을 해칠 권한 따위는 없다)

 

 

제임스 설펠의 [The Domestic Dog: Its Evolution, Behavior and Interactions with people]이라는 책에서 이전에 겪은 심한 자극은 영구적인 신경학적 손상을 입힐 수 있다고 보고 있으며 이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는 행동 문제로 공격성과 두려움(포비아)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행동학적으로 문제를 보이는 개의 경우, 그 개의 개인적인 또는 유전적인 특성 이외에도 이전의 경험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전에 학대를 받은 경험이 있는 개의 경우,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행동학적 변화로는 두려움에 따른 공격성, 외부인 공포, 학대와 연관된 사물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개들은 특징적으로 귀를 뒤로 젖히고, 꼬리를 엉덩이에 붙이는 전형적인 공포 반응을 보인다. 심한 경우, 구토, 설사, 식욕부진 등도 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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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에 에어컨 수리 기사님이 오시자, 화장실 옆으로 가서 미동도 하지 않고 겁에 질려 있다)

 

 

은복이는 잔인한 처벌을 받을 만큼 문제행동이 있는 개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매사에 눈치를 보고 다른 개들에게 한없이 관대하며 전혀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 순하디순한 아이였다. 그런 은복이가 아직도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와 목줄에 대한 거부 반응을 보일 때면 가슴 한편이 아파온다.

 

개는 아름다운 동물이다. 동시에 매우 예민하고 다양한 정서를 가진 동물이다. 개는 이해심 많은 다정한 친구, 이타주의자, 철부지, 천진한 소녀, 걸핏하면 속아 넘어가는 어수룩한 아저씨, 소박하고 순수한 아주머니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나도 이 말에 적극 동감한다. 만약 이런 개들의 심리 깊숙이 자리 잡은 아픔이 있다면 보듬어주고, 따듯하게 감싸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또한, 아무 생각 없이 또는 몰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상처를 주었다면, 이제는 그것을 멈추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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