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함을 드러낸다는 것

칼럼 전문가에게 듣는 동물 이야기
약함을 드러낸다는 것
조회 1295   2년전
고경원 길고양이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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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여행자의 일상여행기                      

#004 약함을 드러낸다는 것​

 ​ 

세상이 달리 보이는 순간이 있다. 만나면 화들짝 놀라 달아나는 길고양이만 보다가, 내게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녀석을 만났을 때가 그랬다. 내가 안다고 믿었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 그 고양이를 아직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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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늦고 마음도 스산해서 집에 곧장 들어가기 싫은 날이면 나는 고양이 화단을 찾아가곤 했다. 고양이들이 사는 은신처 바로 옆은 번화가지만, 몇 걸음만 옮기면 직장인들의 흡연 장소로 쓰이는 쉼터가 있었다. 등받이 없는 벤치도 몇 개 있어서 마음이 심란한 날이면 거기 앉아 고양이를 기다렸다. ‘오늘은 없네?’ 하고 돌아갈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고양이가 나올 때까지 한참을 머물렀다.

 
그렇게 어둠 속에 앉아 있으면 온갖 인간 군상을 볼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잠시 밖으로 나와 전화하는 분식점 청년, 길고양이 밥 주는 할아버지, 등 돌리고 구석에 숨어 담배 피우는 여고생, 때론 노숙자 아저씨까지. 돌 벤치 몇 개쯤 있는 곳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그곳에서 고단한 마음을 추스르고 갔다. 애인과 나누는 짧은 통화, 몰래 피우는 담배 한 대에 힘을 얻고 전쟁터 같은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그 사이에 나도 있었다. 내 마음을 다독여줄 상대가 길고양이였다는 게 거기 모인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을 뿐.
 
그날도 화단 앞 벤치에 앉아 길고양이를 기다리는데 녀석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보통은 길고양이를 만나면 쭈그리고 앉아 사진을 찍는다. 언제든 고양이가 다른 곳으로 달아날 수 있으니 나도 신속하게 따라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오래 걸릴 것 같으면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책상다리로 앉는다. 그때 녀석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몇 번이나 제 몸을 내게 부딪치며 친근감을 표시하더니, 급기야 배를 드러내고 발라당 눕는다.
 
고양이가 배를 드러내는 건 자신에게 가장 약한 부분을 고스란히 내놓는다는 뜻이다. 어떤 보호막도 경계심도 없이. 녀석을 보며 신세계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널 잘 모르는데, 너도 날 모를 텐데. 이렇게 약점을 드러내면 적에게 쉽게 공격당할 수 있을 텐데. 너의 말랑한 배를 호되게 걷어차는 사람도 있을 텐데, 너는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믿을 수 있니. 놀랍고, 반갑고, 슬프고, 미안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복잡한 감정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길고양이는 복잡한 내 마음은 알 바 아니라는 듯 책상다리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와 앉았다.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인간 방석이 되어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다리도 저리고 엉덩이도 시렸지만, 길고양이에게 위로받기만 하던 내가 차가운 돌바닥 대신 따뜻한 벤치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요즘도 발라당 누워 배를 드러내고 누우며 애교를 부리는 길고양이를 간혹 본다. 그때마다 어느 겨울, 내게 배를 드러내며 발라당 눕던 고양이를 만났을 때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상처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믿을 때, 취약한 부분조차 망설임 없이 열어 보일 때 상대방과 교감할 수 있다는 걸 가르쳐주려고 네가 왔구나. 반갑고도 미안해진다. 


CREDIT
글·사진 고경원


본 기사는 <매거진C>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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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소개

고경원 길고양이 통신
2002년부터 길고양이의 삶을 사진과 글로 전하면서 출판, 전시, 강연을 통해 고양이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블로그 ‘길고양이 통신’(catstory.kr)에서 다양한 지역의 고양이 여행기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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