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람마 섬에서 보낸 운수 좋은날

칼럼 전문가에게 듣는 동물 이야기
홍콩 람마 섬에서 보낸 운수 좋은날
조회 1752   2년전
고경원 길고양이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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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여행자의 일상여행기                      
#020 나쓰메 소세키의 고양이를 찾아서​

 

영화배우 주윤발의 고향인 홍콩의 람마 섬(南丫島)은 트래킹 코스와 저렴한 해물요리 레스토랑으로도 유명하다. 이 두 가지를 즐기려는 관광객은 센트럴 페리 터미널에서 용슈완 항 또는 소쿠완 항으로 가는 배를 타고 람마 섬에 들어온 다음, 섬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반대편 항구 쪽으로 넘어가 해물 요리를 맛보고 홍콩 본섬으로 돌아간다. 처음엔 트래킹 코스를 따라 걸어 볼까 했지만, 카메라와 렌즈만으로도 이미 배낭이 무거운 상태라 트래킹까지 하기는 무리였다. 결국 하루에 용슈완과 소쿠완 전체를 돌아볼 생각은 접고, 반나절만 용슈완 일대를 어슬렁거리기로 했다. 며칠간 땡볕 아래 돌아다녀 보니 밥보다 더 간절한 게 시원한 물이어서, 전날 밤 숙소에서 꽁꽁 얼려 둔 500ml 생수와 음료수도 배낭에 챙겨 넣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 얼음물이 문제가 될 줄은….

 

페리에서 내려 용슈완 항에 들어섰을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항구 주변부터 스케치하며 갈 생각에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냈는데, 웬일인지 뷰파인더 너머로 안개가 자욱했다. 배낭 옆 주머니에 꽂아 넣은 얼린 생수병과 음료수 때문에 배낭 속은 반 냉장고 상태가 되어 있었고, 차가워진 카메라가 갑자기 더운 공기에 노출되면서 렌즈에 김이 서린 것이다. 숙소로 돌아가 렌즈를 바꿔야 되나 싶어 센트럴로 돌아가는 배를 탔다가, 마음을 바꿔 출발 1분 전에 배에서 내렸다. 숙소까지 다녀온다면 오전 시간은 날려 버릴 게 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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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유적지를 찾아 먼 옛날을 회상하는 듯한 표정이 재미있어 한참 곁에 머물며 사진을 찍었다.

 

 

우왕좌왕한 시간을 보상해 주기라도 하듯, 바닷가 쪽에서 놀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날 수 있었다. 다가가 보니 중성화수술을 완료했다는 표시로 한쪽 귀 끝이 잘려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져도 녀석은 내 쪽을 힐끗 돌아보기만 할 뿐 달아날 기색이 없다. 누운 자세 그대로 그루밍을 하더니, 하품을 몇 번씩 한 다음 다시 바위에 턱을 기대고 누워 먼바다를 보았다. 근처 음식점에서 횟감을 다듬던 아주머니가 고양이 이름을 부르며 생선 머리를 던져 주는 걸 보면 뜨내기 고양이는 아니고 근처가 제 영역인 듯했다. 해롱해롱한 카메라를 잠시 놔두고 휴대전화 카메라로 고양이를 찍는 동안, 다행히 렌즈에 서린 김도 사라졌다. 습기 먹은 카메라와 렌즈가 괜찮을까 불안했지만, 최소한 모든 사진이 안개 낀 풍경으로 찍히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딘가.

 

해변의 고양이와 한참을 놀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마을로 향했다. 트래킹 코스로 유명한 섬이다 보니, 고양이를 찾으러 접어든 골목 곳곳에는 이정표가 잘 정비되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트래킹 코스를 걷는 관광객들을 따라가 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날 일진을 생각하니 무리다 싶어 용슈완 항구로 되돌아갔다. 그때 트래킹 코스로 접어들었다면 홍콩 고양이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을 놓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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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람마 섬 용슈완 항구 근처 바닷가에서 멍하니 누워 있던 고양이. 인기척이 나도 개의치 않는 무심함에 다가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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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워 있는 동안 내내 하품을 서너 번은 해대던 녀석. 어젯밤 사냥에서 체력 소모가 너무 과했던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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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긴 기다림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기를 태우고 갈 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뚜벅뚜벅 걸어 마중을 나가는 모습에 마음이 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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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탄 녀석의 표정이 한결 안심이 되어 보인다. 이제 사랑하는 가족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항구로 돌아가면서 아까 고양이를 만났던 장소를 힐끔 보았을 때, 누워 있던 녀석이 뭔가 발견했는지 벌떡 일어나 바다를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고양이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배 한 척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부 아주머니가 배를 바위에 잠시 대고 내리자, 고양이는 아주머니 다리에 몸을 부비며 꼬리를 몇 번 탕탕 친 다음 배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아주머니는 고양이가 잘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하곤 다시 바다로 향했다. 그러니까 녀석은 가족들이 바다에서 돌아와 자기를 태우고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엔딩 같은 그 장면을 망원렌즈로 당겨 찍으면서, 가족의 내밀한 한순간을 엿본 것 같았다. 인간과 고양이, 종은 서로 다르지만 둘은 진짜 가족이었다.

 

그날 용슈완에서 찍은 고양이는 녀석을 포함해 고작 두 마리였지만 마릿수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평생 마음에 남는 순간을 찍을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여행은 내게 충분히 가치가 있다. 고양이 사진을 찍다 보면 세상에서 절대적인 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처음엔 운이 나쁜 날 같아도,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좋은 날로 바뀌기도 하니까. 그래서 고양이 여행을 떠날 때면 가슴 설레며 기다린다. 오늘 찾아올지도 모를, 인생 최고의 ‘운수 좋은 날’을.

 

 

CREDIT

글·사진 고경원

 

 

본 기사는 <매거진C>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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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소개

고경원 길고양이 통신
2002년부터 길고양이의 삶을 사진과 글로 전하면서 출판, 전시, 강연을 통해 고양이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블로그 ‘길고양이 통신’(catstory.kr)에서 다양한 지역의 고양이 여행기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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