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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어야 할 곳

  • 승인 2019-11-15 10:5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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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랑 노 견 생 활 기

내가 있어야 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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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어때서

개도 나이가 들면 사람처럼 등이 굽는 걸까. 사람의 등은 굽는 것이고 개의 등은 솟는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려나. 이뿌니의 반듯했던 등이 낙타의 등처럼 볼록 솟아오르고 있다. 이제 튀어나온 등뼈가 만져지고 갈비뼈 라인도 슬쩍 드러나는 것 같다. 잘 먹이고는 있지만, 살이 자꾸 빠지고 특히 근육량이 줄어 뒷다리가 부쩍 더 가느다래졌다. 그렇다 보니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처럼 이리 흔들 저리 흔들, 뒷다리가 앞다리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넘어진다. 살이 빠져 쿠션감이 없으니 넘어질 때 뼈가 다칠까 염려된다. 이뿌니는 보행이 불안정할 때 내 팔이 나 다리에 엉거주춤 엉덩이만 살짝 걸쳐 앉아 쉬었다 가곤 한다. 이제는 엉덩이를 이용해 몸을 기대는 게 편해진 모양이다. 살은 이뿌니가 아니라 내가 빼야 되는데. 남아도는 내 살을 떼어다 말라가는 이뿌니의 몸에 붙여주고 싶다. 이뿌니의 마른 몸과 위태로운 걸음걸이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너는 오늘도 조금씩 늙고 있구나.

개모차를 구입하다

뒷다리 힘이 약해지니 이뿌니의 움직임도 조금 우스꽝스러워졌다. 앞발은 달리고 있는데 뒷발은 끌려가고 있는가 하면 로봇처럼 어색하게 걷기도 한다. 갈수록 서툴고 느려진 산책길에 도움이 될까 싶어 강아지 유모차인 개모차를 구입했다. 이 개모차라는 것이 반려견 천만 시대인 우리나라에서도 아직은 낯선 아이템임은 확실하다. 잘못 걷 는 노견을 개모차에 태우고 동네 순회를 하다 보면 쳐다보고 놀라는 사람들, 킥킥대며 웃는 사람들, 뭐라고 한마디 씩 참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유모차에 의지하며 천천히 걸어 다니시는 동네 할머니 옆을 지나칠 때면 괜스레 뒤통수가 따가운 건 기분 탓인가. 개를 유난스럽게 키우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지만 어쩌겠나. 노견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감내해야 할 것들이 더러 있는 것을. 이뿌니가 개모차를 처음 타던 날 남편조차 창피하다고 뒤에서 떨어져 걸었으니 말 다한거다. 사냥개 출신 커다란 누렁이를 개모차에 실어 나르는 이상한 아줌마로 보였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사실은 이 개가 노견이라 관절도 아프고 디스크도 있어서 잘 걷지 못한다고 항변이라도 하고 싶다. 안아주는 것조차 싫어하던 천하의 이뿌니가 얌전히 개모차에 탑승할 날이 올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 지 못했다. 이뿌니가 늙은 뒤로는 모든 게 노견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고 그렇게 하루가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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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견의 심화 과정

강아지의 노화에도 단계가 있다. 지금 이뿌니는 한층 더 깊은 노화의 단계에 있는 것 같다. 이쁘니의 노화를 처음으로 인지하게 된 건 바로 청력의 변화였다. 그때만 해도 이뿌니의 움직임은 활발했다. 나는 이뿌니가 더 이상 초인종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에 많은 눈물을 흘렸었다. 삶의 질과 생명에는 청력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왜 그리 야단이었을까 싶다. 그때의 이뿌니는 밤부터 아침까지 편하게 잠도 자고 네 발로 씩씩하게 걸을 수 있었는데 귀 좀 안 들리면 어때서. 현재 18세의 이뿌니는 16세의 이뿌니를 부러워한다. “그때가 좋았지”라고 말이다. 최근엔 먹고 자고 싸는 기본적인 기능조차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청력의 변화가 노견의 입문 단계라면 지금은 노견 심화 과정쯤 되는 것 같다. 이뿌니가 아침까지 통잠을 푹 자본 게 언젠지 모르겠다. 한밤중에 홀로 일어나 집안을 방황하는 이뿌니 때문에 나 역시 날마다 피곤에 절어 있다. 설상가상으로 밤에 똥칠까지 해놓는 날이면 으아, 날로 더 흥미진진해지는 노견 생활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상황을 여러 번 겪 다 보니 나는 어느새 위기대처의 신이 되었다. 남편도 나도 이제는 곤히 자는 와중에 벌떡 일어나 기계적으로 사태를 수습한다. 늙고 더 늙으면 진짜로 벽에 똥칠하는 날이 오는 것이다.

이뿌니는 작년에 지독한 피부병을 앓았다. 다행히 지금은 보송보송한 새털이 올라와 예쁜 미모를 되찾았다. 그 후로 이뿌니에게 피부병이 재발하지 않도록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얼마 전 마지막 미용을 한 뒤로부터 등에 털이 나지 않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피부병 문제가 아닌 노화로 인해 자극이 말초신경까지 고루고루 전달되지 않아 얼굴과 가슴, 배와 같은 장기를 덮고 있는 부분 위주로만 털이 나는 거라고 했다. 이뿌니에게 털이 없다는 게 특별한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가뜩이나 말라가는 몸에 털까지 없으니 괜히 더 아파 보여 속이 상한다. 털이 없으니 검버섯이 도드라지고 튀어나온 등뼈로 자꾸만 시선이 간다. 전신에 털이 다 없을 때는 몰랐는데 등에만 털이 없으니 모양이 기괴하다. 우리의 자랑이던 이뿌니가 노화로 몸이 약해지는 것도 서러운데 털까지 없다니. 시간이 지나면 결국 털이 자란다고는 하지만 같은 경험을 한 강아지는 원상태로 돌아가는 데 8개월이나 걸렸다고 한다. 8개월 뒤에 이뿌니가 살아 있기나 할까. 이뿌니가 계속 옆에 있어 주길 간절히 바라고는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도 한두 달 뒤의 미래를 자신하진 못하겠다. 이뿌니가 귀여운 털북숭이가 되려면 8개월이 걸릴 테니 우리 이뿌니, 그때까지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털아 어서 자라나렴. 야한 생각 많이 하고 쑴풍쑴풍 털 좀 어서 길러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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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어울리는 자리

이뿌니는 여전히 밤에 잠을 잘 못 자고 아슬아슬한 뒷다리로 걷고 있지만, 다행히 심각한 병세는 없다.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맛있는 반찬 좀 달라고 투정하는 듯 1년째 먹고 있는 처방식을 거부하는 날도 가끔 있지만, 평균적으로는 그것조차 잘 먹는 편이다. 자기 의지로 조절되지 않는 똥 칠쯤이야 이력이 붙었으니 우리가 치우면 그만. 이뿌니가 낮잠 자는 시간에 맞춰 나도 자유시간을 가진다. 얼마 전에는 이뿌니를 떼어놓고 모처럼 여행을 다녀 왔다. 호텔에서 며칠간 잠을 자며 깨달았다. 방해하는 개가 없으니 이렇게 숙면할 수 있구나! 꿀 수면의 신세계를 경험하고 다시 개 수발을 드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조금 피곤해도 여기가 내 자리가 맞는 것 같다. 손 많이 가는 노견 아가의 곁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다. 몸은 피로해도 눈으로 이뿌니를 늘 지켜볼 수 있는 곳, 마음이 편안한 이 곳이 아직은 나에게 어울리는 자리인 듯싶다. 힘 냅시다. 노견과 노견을 보살피는 견주님들 모두, 잠 못 자고 고단해도 우리 곁에는 아직 따뜻한 숨을 내쉬는 명랑 노견들이 있으니까요.

CREDIT

글·사진 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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