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아이
열여섯 사춘기 소녀, 이로미
내가 고1 때 생후 3개월의 말티푸 ‘로미’가 우리집에 왔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달려와 어머니의 스타킹으로 로미와 줄다리기를 했다. 스타킹을 뺏기지 않기 위해 입을 꽉 다물고 흰자위를 드러내는 로미의 얼굴에 푹 빠졌다.
코딱지만하던 게 어느새 성견이 되었고, 스타킹에 예전만큼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만 보면 토끼처럼 깡총 거리며 달려오던 로미가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못들은 척 무시하고 지나간다. 우리 가족의 성을 물려받아 이름도 석자로 개명했다. 내 여동생 ‘이로미’는 어느덧 16살 사춘기 소녀가 되었다.
중3의 단발머리 사춘기 소녀
이로미는 이제 막 16살이 된 곱슬머리 말티푸이다. 하얀 생크림에 까만 초콜릿 시럽을 세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단순하고 이쁘게 생긴 내 여동생이 벌써 16살이란다. 나는 로미의 나이가 믿기지 않아, 유치하지만 확실하게 세어보기로 했다. 손가락을 접었다 펴보았다. 내 여동생이 우리 집에 온 2002년부터 2018년까지 한 해 한 해를 중얼거렸다. 오른 손가락은 세번 오므라졌다 펴지고 새끼손가락 하나가 남았다. 이로미는16살이 맞다. 사람 나이로 80살이다. 즉, 언제 무지개 다리를 건너도 이상하지 않을 노령견이다.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나?’하고 여동생을 바라보니 녀석도 나를 빤히 바라본다. 10초간 정적 속에 서로를 무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나는 녀석의 고요한 표정에 웃음이 터졌다. 나의 웃음 소리가 팽팽한 긴장감을 갑작스럽게 깨트렸는지, 로미는 요란한 발톱 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잠시후 슬며시 나타나 벽 뒤로 얼굴을 반만 내밀고는 나를 바라본다. 내가 살짝 일어나는 동작만 취해도 달아나기 위해 엉덩이를 위아래로 움찔하는 저 녀석이 80살일 리가 없다. 로미는 그저 올해 열여섯, 중3의 단발머리 사춘기 소녀이다.
사춘기 소녀는 다이어트 중
내 눈에 로미는 한창 이쁠 소녀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로미는 나이가 들어가며 살이 쪘다. 원래 3.5kg였던 여동생의 몸무게는 최근들어 400g이나 쪄서 3.9kg이 되었다. 이대로 계속 살이 찌면 로미의 관절에 무리가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동생의 건강을 챙겨야 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로미의 운동량은 항상 평균 이상이다. 나만 보면 촐싹맞게 두다다다 뛰어다니며 헥헥거리기 때문이다. 또한, 로미의 식사량도 종이컵에 정확히 계량하여 준다. 로미가 살이 찌는 원인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로미의 똥은 조금씩 더 굵어졌다.
시간이 지나 원인을 찾았다. 아버지가 식사를 하실 때 마다 바닥에 슬쩍 간식을 흘려주셨다. 16년 전, 강아지를 데려오면 갖다버린다던 아버지는 로미의 애처로운 눈빛을 이기지 못해, 밥을 엄지 손가락 만큼 떼어주거나 국 그릇에 있던 고기를 식구들 몰래 주셨다.
16년 전, 강아지를 사자고 떼를 쓰던 나는 로미에게 매우 엄격한 편이다. 간식은 거의 주지 않으며, 눈도 마주치지도 않는다. 내가 밥을 먹을 때 내 옆에 다가와 나를 애처롭게 올려다 볼 때면, 나는 발가락 끝으로 로미를 휙 밀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도 감독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로미에 게 간식을 주려할 때면 ‘안돼요!’라고 외친다. 로미가 간식을 먹으려하면 ‘안돼!’라고 외친다. 나는 요즘 아버지와도 그리고 로미와도 소원하다. 하지만 로미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이러한 악역도 기꺼이 맡을 생각이다.
나처럼 키워서 오빠가 미안해
내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는 가정교육에 매우 엄격하셨다. 특히 ‘남에게 피해를 주어선 안 된다.’ ‘이러면 남들한테 욕먹는다.’ 등등의 교육이었다. 남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일본의 메이와쿠 문화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로미가 남한테 피해를 안 줬으면 했다.
펫티켓 문제가 불거지다보니, 로미를 더욱 엄격하게 교육했던 것 같다. 살짝만 깨물어도 혼냈고, 작은 사고에도 ‘안돼!’를 외쳤다. 덕분에 로미는 다른 사람을 보며 짖지도 않고, 물지도 않고, 덤비지도 않았다. 사실 그런 조용한 면이 로미의 오빠로서 꽤 자랑스러웠다. 나 또한 그렇게 컸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로미와 함께 한강 잠원지구로 산책하러 나갔을 때 사건이 터졌다. 목줄을 하지 않은 까만 강아지가 멀리서 로미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그 강아지가 놀자고 달려온 건 줄 알았다. 그 까만 개는 로미의 목덜미를 물더니 좌우로 흔들었고, 로미는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황한 나는 까만 개의 배 밑에 발등을 댄 후 들어 올려 녀석을 공중으로 띄웠다. 내가 로미를 급히 안고 목덜미에 난 상처를 살피는 동안, 주인으로 보였던 젊은 여성은 까만 개를 안고 사라져버렸다. 그때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지금도 그 까만 개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지 못한 게 후회된다. 무엇보다 한 대 맞고서도 반격할 생각조차 못하는 로미를 보며, 녀석을 엄격하게 키운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내 여동생은 내가 지켜줬어야 했다.
검버섯이 하나 두울
나는 로미와 산책한 후 목욕시킬 때마다 생각이 깊어진다. 로미의 등에 물을 뿌리면 핑크색 맨살과 함께 거뭇거뭇한 검버섯이 드러난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로미의 등에 검버섯이 하나 둘 늘어간다는 것이다.
‘열여섯이면 이제 중3 사춘기 소녀네. 어리네’하며 로미의 현실을 외면해왔지만, 분명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여동생은 늙어가고 있다. 그날은 목욕이 끝난 후, 녀석을 차가운 바람으로 묵묵히 천천히 오래 말려주었다. 젖은 로미의 등과 검버섯을 보며 내 눈과 코끝이 찡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로미는 자신을 잡고 있는 내 손 힘이 약해진 걸 느끼고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바다에서 막 건져올린 생선마냥 위아래 발버둥 거리더니 내 손을 뿌리치고 저 멀리 도망갔다. 평소 같았으면 이리오라며 으름장을 놨을 테지만, 점점 멀어져가는 녀석의 똥꼬를 바라보며 웃음이 나왔다.
영화의 제목처럼, 로미의 시간은 거꾸로 가는 것 같다. 시간을 달리는 것 같다. 나잇값을 못하고, 행동에 무게감이 없다. 16년 전,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와 차이가 없다. 검버섯이 늘어도 내 여동생은 철이 들지 않는다. 동시에 나는 로미의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할 여유가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든다.
언젠가는 녀석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노령견이라는 현실을 직면해야겠지만, 난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사실, 앞으로도 준비하고 싶지도 않고 걱정하고 싶지도 않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저 열일곱, 열여덟의 풋풋한 여동생으로 남아주길 바란다.
CREDIT
글 이제원 그림 지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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