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 노견 생활기
하나부터 열까지,
얼마나 더 닮아갈 건지.
이뿌나, 우린 정말 닮았나봐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와 이뿌니가 서로 닮았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무척 좋다. 동글동글한 눈, 심술이라도 난 듯 튀어나온 눈두덩이, 고집스럽게 닫힌 입술, 기분이 좋을 땐 헤 벌어지며 드러나는 분홍색 혓바닥까지 어디 한군데 예쁘지 않은 데가 있어야 말이지. 그런 나의 개와 내가 닮았다는 것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외모에 대한 칭찬 중에 최고가 아닌가 싶었다. 적어도 우리 개 덕후들 사이에선 말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닮았다 생각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어딘지 모르게 이뿌니와 비슷하다고 하면 기분은 좋으면서도 솔직히 의아했었는데, 그런 소리를 17년째 듣다보니 이제는 이뿌니 얼굴을 보면 저게 내 얼굴인가보다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나 자신은 아직도 우리가 닮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남들의 입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니까 그런가보다 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 사람들이 이뿌니와 남편이 닮았다는 소리도 하곤 한다. 나와 이뿌니가 닮았다고 하는 점 중에 하나는 적당히 크고 동그란 눈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뿌니가 얇게 찢어진 반달눈을 가진 남편과도 닮았다고? 나와 개가 닮고 개가 남편을 닮았으면 남편과 나도 닮았다는 말인데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셋이 닮아가는 중이었나 보다.
외모만 봐서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 우리 부부의 교집합은 이뿌니 하나뿐이니 지금보다 더 오래 살다보면, 우린 모두 다 강아지 같은 얼굴을 갖게 되려나.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해마다 결혼기념일에 맞춰 셋이서 사진 찍다가 멈춘 것, 다시 부지런히 찍어야 할 것 같다.
나를 닮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결혼 전 남편은 10년 넘게 요크셔테리어를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작은 개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다 무게로 치면 요크셔테리어의 3배가 넘는 중형견, 그것도 지랄 맞은 코카스파니엘과 살게 되었으니 살면서 적지 않게 당황하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워낙에 나처럼 모태 개 덕후였으니 망정이지, 품행이 방정맞은 우리 이뿌니를 겪어내는 건 십여 년 함께 살던 친정엄마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남편에겐 오죽했으랴. 처음으로 자기가 목욕시켜보겠다고 당시 열두 살이던 이뿌니와 함께 욕실로 들어갔던 남편이 기억난다.
예의바르고 순했던 요크셔테리어와는 사뭇 다른 이뿌니의 폭주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나온 남편은 그때부터 툭하면 이뿌니가 나를 닮았다고 말한다. 세상 제일의 말랑말랑 순둥이처럼 자고 있을 때나 총명한 눈으로 오른발, 왼발 내어줄 때 나를 닮았다고 해주면 좀 좋아? 주로 사납게 으르렁거릴 때, 얌체같이 접시위의 토스트를 훔쳐 먹을 때, 시끄럽게 코를 골아댈 때 나를 닮았다고 한다. 하필이면 못된 성질만 나를 쏙 빼닮았다고 하니 그건 아니라고 항변해야 마땅하건만 어쩐지 다 틀린 말 같지는 않아 슬그머니 꽁지를 뺀다. 가만히 나의 평소 모습을 떠올려 이뿌니에게 대입시켜보면 대부분은 나도 모르게 수긍하게 되니 억울할 것도 없다. 틀림없이 내가 이뿌니를 나처럼 키웠다. 완강하고 고집스럽게, 다정한 면보다는 거친 남성성을 강하게 이끌어내고 말았으니 이를 어쩐담. 나를 닮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식성까지, 모든 게 나를 닮아가는 걸까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여자가 된 것처럼 이뿌니도 사람이 주는 밥 10년 먹었으니 얼추 사람이 되었다 생각하나보다. 먹성 좋은 어릴 때는 어떤 사료를 던져놔도 열이면 열, 가리는 법 없이 뭐든 잘 먹어주었는데 이제는 그럴 짬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지구에는 사료보다 맛있는 식재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리고만 영특한 노견. 제 건강을 챙기는지 사람이 먹는 조리된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 대신 생야채나 과일은 너무도 당당하게 요구한다. 당연히 제 것인 것처럼 밥그릇 속의 사료보다는 배추 한 장, 당근 한 토막에 더 열광한다. 가끔 사료 위에 이뿌니가 좋아하는 야채들이나 닭고기를 삶아 얹어 주다보면 무슨 개가 사람처럼 밥과 반찬을 놓고 먹으려고 하는가 싶어 웃음이 나곤 한다.
감자보다는 고구마를 더 좋아하고, 오이 대신 당근을 선택하는 것도, 그리고 안 먹던 토마토를 먹기 시작한 것 역시 모두 다 나를 닮아가는 것일까. 식성만 보면 확실히 남편보다는 나의 취향과 비슷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입 짧은 남편 대신 잘 먹는 나를 좀 더 닮으려는 것은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사람이 되어가는 이뿌니
이뿌니는 꼬물이 시절 밤에 낑낑거리는 게 안쓰러워 침대 위로 올려 데리고 잔 게 버릇이 되어 아직까지도 나와 한 침대를 쓴다. 개에게는 자기만의 공간이 있어야 한대서 뒤늦게 방석을 만들어주기도 했는데 본인이 사람이라 생각하는 개인지라 방석은 짧은 잠을 잘 때나 쓰고 나머지는 사람 침대에서 함께 잔다. 침대 하나에 남편과 나, 중형견이 각각 자리를 잡으면 그때부터는 땅따먹기가 시작된다.
양쪽에 사람 둘이 눕고 이뿌니는 항상 가운데에 눕는데 양심없이 네 발을 다 쭉 펴고 자기 때문에 제일 많은 면적을 차지하게 된다. 땅따먹기는 커녕 제 땅 지키기도 실패한 우리는 한밤중에 이뿌니를 피해 머리와 발 방향을 바꿔 자기 일쑤다. 그렇게 하면 셋의 어깨가 닿지 않게 되어 상체만이라도 좀 넉넉해지기 때문인데 신기한 건,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 발치에 있어야 할 이뿌니가 우리와 똑같은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자다가 여러 번 자세가 바뀔 수야 있지만 매번 신기하게 우리와 항상 머리를 같은 방향으로 하여 나란히 잔다는 게 우습다.
자기도 사람이라고, 이 작은 꼬맹이가 꼭 우리처럼 나란히 누워 베개를 베고 자려고 애쓰는 게 귀엽다. 좁은 어깨로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면서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고는 아저씨 강아지.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를 닮아갈꺼면 사람의 기나긴 수명이나 좀 닮았으면 좋겠다. 자기 하려는 대로 내버려두면 얼마나 더 나를 닮아갈지 오랫동안 지켜보고 싶다. 진짜로 사람이 될지, 되려다 말지 궁금하니까.
CREDIT
글 사진 한진
에디터 이제원
본 기사는 <매거진P>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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