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사 S씨의 일일
봄맞이
노란 햇살이 들어차는 시간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유기견과의 인연은 나를 수의사로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나고 자란 서울에서 시골까지 내려오게 했다. 지금 나는 시골에서 유기견 7마리와 유기묘 2마리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아마 생명의 리듬을 담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평생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시골에서의 계절 변화는 자연과 오롯이 마주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혹독한 추위가 가고 찾아오는 보드랍고 따듯한 봄은 유독 가슴을 뛰게 한다. 풀숲에서 우는 작은 벌레 소리에도, 살짝살짝 얼굴을 내비치는 들꽃에서도 계절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봄의 시작은 개들에게도 깨어나는 시기다. 추운 겨울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낸 아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문을 박차고 나가기 때문이다.
개들은 햇빛이 잘 드는 자리를 찾아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겨우내 맘껏 하지 못한 놀이를 하느라 점점 귀가시간이 늦어진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나도 덩달아 책을 들고 정원으로 나간다. 때론 노트북을 들고 노란 햇살을 받으며 일을 한다. 봄은 그렇게 아이들과 나를 이끌고, 우리는 한껏 봄을 즐긴다. 맑은 공기와 새소리 그리고 따듯한 햇살은 몸 안의 탁한 기운을 빠져 나가게 하고, 싱그러운 활기를 들어차게 한다.
오늘도 쉴 틈 없는 하루
봄은 넓은 아량으로 많은 것을 베푼다. 제일 먼저 마중을 나와 주는 것은 쑥이다. 내가 쑥을 캐러 바구니를 들고 나오면 개들은 좋아서 춤을 춘다. 나와 함께 산으로, 들로 쑥을 캐러 다니는 것이 그렇게 좋은가 싶다. 내가 햇빛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쑥을 뜯을 때, 개들은 그 흔한 장난감 하나 없이 어찌나 잘 노는지… 몰려다니면서 서로 장난치며 노는 것이 그저 예뻐서 웃음이 난다.
애들이 좋아하는 또 다른 시간은 솔방울을 주우러 다니는 것이다. 떨어진 솔방울을 깨끗하게 씻어 물속에 넣어두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입을 오므린다. 오므린 솔방울을 집안 곳곳에 두면 아주 천천히 입을 벌리면서 수분을 내뿜는다. 그야말로 친환경 가습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에서 ‘자연’스럽게 자연친화적인 삶을 함께 꾸려가며 생활한다.
생각보다 바쁜 시골 생활에 7마리의 개와 2마리의 고양이가 더해진 하루 일과는 거의 쉴 틈이 없다. 왜인지 일은 끊임없이 생기고 일을 다 처리하고 나면 그새 해는 산자락에 걸려있다. 그러면 나는 자연에 맞춰 움직이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불투명한 날, 무조건 밖으로
어떤 날은 일도 손에 안 잡히고 모든 것이 불투명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날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무조건 밖으로, 자연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쌓인 솔잎 위를 뛰어다니거나 연못을 배경으로 바위에 앉아 풍경을 즐긴다. 그런 모습들을 한 컷의 사진에 담아내면 만족스런 하루를 보냈다는 뿌듯함이 들고는 한다.
봄이 오면 해가 점점 빨리 뜨니 나의 기상시간도 덩달아 일러진다. 아이들이 아침 산책을 갈 시간이라고 재촉하는 탓에 아직 잠에서 덜 깬 채로 산책을 나선다. 아침부터 힘이 어디서 솟아나는지 개들은 이리로 뛰어갔다, 저리로 몰려갔다 아주 신이 났다. 개들은 시계가 없던 시절처럼 계절에 맞추어 생활한다. 겨울에는 늦잠을 자고 봄이 오면 일찍 일어난다. 저녁 7-8시면 해가 지는 이곳은 그때부터가 밤이다. 서울로 치면 아직 초저녁이지만, 아이들은 방에 들어가자고 부산을 떤다. 이렇게 나는 개들 덕분에 자연의 시계에 맞춰 생활하게 된다.
어떻게 즐기지 않을 수 있을까
봄이 왔지만 아직은 쌀쌀한 아침, 저녁. 벽난로에 불을 지피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나무를 모아야 한다. 개들을 이끌고 숲 속으로 들어가서 이곳저곳에 떨어진 나무를 줍는 것은 주요 일과 중 하나다. 하지만 개들은 신나게 놀고 나만 일하니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나뭇가지 하나라도 주워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내 생각에는 조금도 관심 없는 아이들은 오늘도 무겁게 수레를 끄는 내 옆에서 장난치며 뛰어다니기 바쁘다. 힘들게 만들어 놓은 장작더미가 놀이터인 것 마냥 그 위에 올라가기도 하는 아이들은 나를 보며 만개한 미소를 짓는다. 그저 해맑은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다.
개들은 나에게 행복이라는 것은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알려준다. 나의 손길 하나에 뛸 듯이 기뻐하고, 나의 온기에 안도한다. 산책을 나가면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쉬며 있는 힘껏 달리기도 한다. 이 모든 걸 순리라고 여기며 지금을 즐기는 개들. 아이들은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건다. 모든 건 잘 될 거라고. 이렇게 아이들이 내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데 어떻게 봄을 즐기지 않을 수가 있을까.
CREDIT
글 사진 손서영
에디터 박고운
본 기사는 <매거진P>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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