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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방년 17세

  • 승인 2018-02-13 10: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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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 노견 생활기

드디어, 방년 1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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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힙합 스웨그를 지닌 나의 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때마다 혹시 이뿌니와 함께 보낼 마지막 여름 일지 몰라, 마지막 가을 일지 몰라 이뿌니와의 계절 놀이에 소홀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거기에 노년을 함께 하는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긴 덕에 지난가을, 전에 없이 바쁜 ‘소풍 성수기’를 보냈다.

그리고 찾아온 겨울, 뛰어나가 놀기에는 바람이 너무 차다. 산책하고픈 이뿌니를 위해 중무장을 하고 나가지만 그래도 인간인 나는 많이 춥다. 하지만 이제는 일방적인 요구가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방향에 맞춰 타협할 줄 아는 16년 지기 우리가 아니던가.

다행히 산책 비수기에도 실망치 않고 지루할 틈 없는 실내 생활을 만들어가는 우리 이뿌니. 사람으로 따지자면 증조 할아버지 격인 나이지만 영혼만은 아직도 뜨거운 힙합 스웨그를 지닌 나의 늙은 개는 오늘도 장난감을 입에 물고 온 집 안을 쌩쌩 달린다. 아, 물론 실제로는 ‘쌩쌩’보다는 조금 느린 달리기지만 말이다. 할아버지, 관절 삐그덕거려요. 좀 더 살살 뛰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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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만큼 콩고물 획득 연륜도

겨울의 산책은 호기롭게 나갔다가 칼바람 맞고 혼쭐나서 돌아오는 일이 대부분이다. 늙은 개들은 특히나 추위에 관절과 근육이 위축될 수 있어 무리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산책을 안 나가면 다른 집 노견들은 하루 종일 집에서 잠만 잔다는데 이뿌니는 아직 집안에서도 활력이 넘치는 편이다. 노곤한 잠에 빠져있다가도 내 기척을 금방 알아차리고 참견하겠다고 졸졸졸. 이뿌니가 좋아하는 배추나 무를 다듬고 있으면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아먹겠노라 싱크대 아래 얌전히 자리 잡는다.

젊을 때는 앞발을 일으켜 싱크대 가장자리를 붙잡고 스스로 사냥을 시도해보곤 했으나 관절이 약해진 다음부터는 직립보행 자세가 불편한지 먹이를 줄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을 택했다. 딱히 훈련시킨 적은 없는데 인간과 함께 산 16년의 세월이 스스로를 생각할 줄 아는 개로 만든 셈이다. 이럴 땐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한입 얻어먹을 확률이 높은지 경험치 대비 매 순간 탁월한 판단력을 발휘한다. 물론 뛰어난 연기력도 겸비하고 있지만 그 정도는 모른 척 눈감아주자. 이뿌니는 순간순간 누구보다 열심히 삶을 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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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을 사주면 볼 수 있는 최고의 세레머니

노견 이뿌니에게 최고의 액티비티는 장난감 물기가 되었다. 제법 큰 에너지를 요하는 점프나 전력 질주 같은 활동적인 움직임은 관절이 따라주지 않다 보니 제 딴에는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필요한 열량만큼을 소모하는 놀이를 찾은 모양이다. 물론 어릴 때부터 장난감을 좋아하긴 했지만 나이가 든 뒤로는 마치 하루의 일과표를 정해둔 것처럼 규칙적으로 일정량의 시간 동안 늘 장난감을 입에 물고 있다.

한창때는 고무로 된 장난감을 물고 삑삑 소리 내길 좋아했는데 이빨이 많이 빠진 뒤론 취향이 달라졌다. 솜으로 속을 채워 입에 물기 폭신폭신한 봉제인형으로 완전히 마음을 돌린 것이다. 새로운 봉제인형이 집에 들어오면 이뿌니는 대번에 자기를 위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잽싸게 달려와 입에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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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양양하게 새 인형을 물고 거실에서 주방으로, 주방에서 침실로, 그리고 다시 거실로 이어지는 기쁨의 코스를 서너 차례 반복해서 완주한 뒤에야 끝이 나는 인형 전달식. 열이면 열 매번 같은 코스를 도는 세레머니지만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어쩐지 새 인형 값을 그런 식으로 이뿌니에게서 받는 느낌이다.

손님, 장난감 값보다 귀여움을 좀 더 많이 내신 것 같은뎁쇼. 하지만 그 귀여운 얼굴로 인형의 귀나 눈알, 다리를 잘근잘근 깨물어 씹어먹는 충격적인 반전이 있다는 걸 잊어선 안된다. 개봉 며칠 뒤 성치 않은 상태로 발견되는 인형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다 미안해진다. 인형의 플라스틱 눈알은 대체 왜 빼먹는 걸까. 16년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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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한 마리 키우는 데 드는 품이란

코커스패니얼은 사람에게 무척 친화적인 개다. 이뿌니 역시 사람을 무척 좋아해서 집에 놀러 오는 누나들 사이에 펑퍼짐한 궁둥이를 들이민다. 물론 이쁨 받고 싶은 마음의 뒷면에는 뭐라도 한입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반반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 그렇지 네놈의 속셈이 뭔지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인형을 누구에게 빼앗길세라 코를 씰룩거리며 무서운 얼굴을 할 때와는 다르게, 세상 그 어떤 개보다 순진할 수 없는 눈망울을 반짝이며 그윽한 시선을 보낸다. 이렇게 예쁜 눈 뜨고 있는데도 나 한입 안 줄 거예요? 아무렴, 마음과 몸의 양식을 지양분 삼아 큰 우리 이뿌니에겐 마음을 나누는 강아지 친구는 없어도 친하다 할 수 있는 사람 누나들은 제법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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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아니지만 이뿌니의 십여년을 곁에서 함께 지켜봐 준 고마운 누나들이 있어 조금 아프다는 소리에 응원 방문까지 받는 호사도 누린다. 사람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더니 개 한 마리 키우는 데는 마을까진 아니어도 주변 지인들의 따뜻한 관심이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훈훈한 우정을 먹고 자란 이뿌니가 드디어 올해 방년 17세, 개의 나이라 말하기엔 쉽게 어울리지 않는 숫자다. 그럼에도 여전히 똥꼬 발랄한 이뿌니, 2018년 황금 개띠의 해엔 어떤 명랑한 사건들이 펼쳐질지 두근거린다.?

CREDIT

글·사진 한진

에디터 이은혜?

본 기사는 <매거진P>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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