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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마을 지킴이들의 또다시, 겨울
시골 길 위의 초라한 강아지들에게 깨끗한 물 한 번 제공하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지금 소개하는 이 부부는 이름 모르는 시골 개들을 위해 믿기 힘든 정성을 쏟았다. 10월호에 이어 부부가 남긴 기록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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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시골 개 콩이는 모진 한파를 견디며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무성한 털을 정리해주고 이따금 콩이가 있는 곳에 들러 음식과 담요를 제공했다. 추위에 자식들을 잃은 순이는 유일하게 남은 새끼 한 마리와 허기진 상태로 발견됐다. 다행히 도움의 손길이 이어져 겨울의 고비는 넘겼으나, 돌봄이 부족한 상태로 방치된 아이들은 모든 계절 이겨내야 할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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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봄
늦게까지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심었더니 몸살이 단단히 났다. 그래도 비가 내린 후 밭에는 노란 꽃창포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나는 빽빽한 상추를 솎아내 콩이 할머니도 드리고 마을 사람들도 주려고 봉지 몇 개를 채웠다. 이현동에 도착하니 콩이와 금동이(순이의 새끼)가 알아보고 짖어댄다. 이 둘은 어느덧 친구가 됐다. 앙상하게 말랐던 순이도 털이 복슬복슬 자라고 살이 조금 올랐다. 그래도 비온 뒤 흙투성이가 된 순이의 물그릇을 보면 여전히 한숨이 나온다. 다행히 오늘은 밥그릇에 사료가 조금 담겨 있다.
콩이 할머니 집에 가니 동네의 황구 주인이 마실 와 있었다. 대뜸 주인 왈, 나는 내 몸뚱이한테도 그렇게 잘 하지는 못 허는디 어떻게 그렇게 개가 좋댜? 농담과 힐난이 섞인 듯한 말씀을 나는 별 대꾸 없이 듣고 있었다. 문득 콩이의 눈망울이 떠올랐다. 그 시선은 언제나 애처로이 나를 향하고 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어떤 도움이 필요한 거야? 그 뜻을 알 수 없기에, 짓궂게 말씀하시는 할머니들이 야속했다. 콩이야, 우리 조금만 기다리자. 분명 좋은 날이 올거야.
시골 밖은 요새 떠들썩하다. 나라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부디 모든 강아지들이 사람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초여름이 딱 한 발짝 남은 듯한 뜨끈한 봄날. 콩이의 목욕을 단행했다. 콩이에겐 거의 5년 만의 목욕이다. 밭에 지하수가 있어 그 물을 큰 통에 받고 미지근해지길 기다리는 동안, 콩이 뒷다리에 뭉친 털들을 밀어내기로 했다. 그런데 콩이가 세차게 거부했다. 콩이가 좋아하는 과자를 가지고 달래 보았지만, 남편 손을 깨물기까지 하며 싫어했다. 콩이는 여러 번 만났지만 가끔씩 우릴 예민하게 대하곤 한다. 길 위에서 생긴 마음의 상처가 깊은 탓이리라.
콩이는 할머니의 콩밭에서 4년이라는 세월 동안 허수아비 노릇을 하던 개다. 그러기 위해 태어났을 리 만무하나, 콩이는 정적이 흐르는 조용한 밭을 밤낮으로 지켰다. 콩이 할머니 집에 오기 전에도 밭을 지켰던 강아지라고 한다. 처음 만났던 지난겨울엔 이목구비를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털이 나 있어 정말 허수아비처럼 새는 잘 쫓았겠다 싶더라. 경계하는 콩이를 달래며 조금씩 털을 밀자, 털 아래 외형이 조금씩 드러났다. 긴장하던 콩이는 목욕을 시작하자 개운함을 느꼈는지 가만히 있어 줬다. 목욕을 마치니 고약했던 냄새가 사라지고 향기가 폴폴 났다. 안타깝게도, 강아지들은 사람의 마음과 손이 있어야 예쁘게 다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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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여름
콩이는 콩밭을 지키는 일에서 잠시 벗어난 상태다. 그런데 콩이 힘껏 여무는 시기, 고라니들이 콩잎을 털어 먹고 가 속상하다는 얘기를 콩이 할머니로부터 들었다. 할머니는 보초를 위해 다른 집 개인 순이를 빌리러 가기도 했다. 콩이가 다시 밭으로 갈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콩이가 잘 짖어 콩밭 지키는 데는 최고라고 추켜세웠던 적이 있다. 우리 부부는 상의 후 콩이 할머니께 말씀드려 콩이를 우리 집으로 입양하고 싶다고 했다. 콩이와 오래 교감을 하고,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예전부터 염두에 뒀던 일이었다. 할머니는 흔쾌히 허락해 줬다.
콩이를 데리고 가는 날. 콩이 할머니께 그동안 콩이를 길러 주셔서 감사하고, 예쁘게 잘 키우겠다고 인사를 드렸다. 섭섭해하실까봐 소정의 사례도 했다.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셨지만 콩이를 키우며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으셨을 테니 응당 드리는 게 마땅하다 생각했다. 맛있는 거 사 잡수시라고 당부하며 손에 쥐어 드렸다. 차에 오른 콩이가 불안해할까 봐 걱정했는데 편안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콩이야, 그동안 콩밭 지키느라 고생 많았다. 이제 땡볕 아래에서 밭을 지키지 않아도 되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짠 밥과 더러운 물을 마시지 않아도 될 거야.
비가 억수처럼 내려 콩이의 친구들을 만나지 못해,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눈앞에 아른거렸다. 여전히 작은 생명들이 시골의 불편한 흙바닥 위에서 허기지고 고달프게 생존하고 있다.
비가 그쳐 잠시 차 밖으로 나왔다. 물기 머금은 접시꽃이 싱그럽게 피어 있었다. 콩이는 냄새를 맡으며 한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니다 다시 차에 올랐다. 첫 날 밤, 콩이는 마치 오랫동안 이 집에서 살았던 것처럼 짖지도 않고 코를 골며 깊은 잠을 잤다.
집에 온 지 한 달이 흘렀다. 콩이는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오전엔 동물병원에서 심장사상충 주사를 맞고 온 후 집안을 빙빙 돌아다니며 안절부절못한다. 콩이는 심장사상충 2기였다. 밭을 지키며 야생동물과 대적했던 콩이의 원동력은 잔밥과 오염된 물이었다. 시골 개의 적은 비슷한 덩치의 동물이 아니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벌레나 음식 속의 균이다. 콩이가 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후유증을 앓는 콩이가 가여워 주책없이 자꾸 눈물이 흐른다.
며칠 뒤 병원을 찾았다. 콩이의 코피가 멈추질 않았다.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폐출혈은 아니었고, 사상충 치료를 위해 복용한 혈전 용해제 때문이었다. 지혈이 잘 안 됐는데 섣불리 지혈제를 쓰면 안 된다고 했다. 원장 선생님이 시킨 대로 얼음 수건으로 문대니 차차 상태가 좋아졌다. 콩이는 질병이 있긴 하지만 식성이 좋아 우리 집 다른 강아지인 똘이 밥도 곧잘 빼앗아 먹고, 밖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실내 여러 물건에 호기심도 왕성하게 보인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가슴 덜컹 내려앉는 일이 생겨 버린다. 남편도 직장에서 허겁지겁 달려와 동물 병원을 찾았다. 괜찮아지다가도 이내 숨을 너무 헐떡거려 겁이 나 죽겠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버텨 줘, 콩이야. 평범한 개로 돌아가기 위한 관문이 이렇게 험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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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가을
며칠 전부터 콩이가 목구멍에 달라붙은 걸 뱉어내려는 듯 켁켁거리더니 어젯밤엔 잠도 못자고 기침을 해댔다. 검진 결과 원장님은 숨 쉬기 버거워하는 콩이에게 산소 호흡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폐 주위가 많이 손상된 것 같다고 말했다. 콩이는 앞으로, 어쩌면 평생 심장 약을 먹어야 될지도 모른다. 다른 강아지들은 심장 사상충 치료를 받으며 힘들어하다가도 차차 적응한다고 하는데,콩이는 약 기운에 무력하게 휘청거린다. 호흡기 대신 좀 더 강한 약을 조제해 받기로 하고 병원을 나왔다.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살긴 했지만 자연은 자연이었던가. 아파트가 답답한지 콩이는 거실에 있다가도 베란다로 나가곤 한다. 거기에선 좀 숨이 트이는 모양이다.
콩이가 사상충 치료를 시작한 지 세 달이 되었다. 살도 오르고 산책도 즐기며 건강을 회복하나 싶다가도 다시 나빠지기 일쑤다. 대소변을 잘 보지 않고 배엔 복수가 차 수박처럼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 다이어트와 운동을 병행하고 복수 빼는 약을 시간을 정확히 지켜 먹이는 데도 배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병원에서 주사기로 복수를 빼냈는데 거의 1L의 물이 배출됐다. 복수 역시 사상충 치료의 후유증으로, 심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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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치료 시간을 버티고 집에 와서 새근새근 잠든 콩이를 보며 나는 작은 후회에 휩싸였다. 올 여름 콩밭에 다시 끌려갈지 모르는 콩이를 급히 데려온 것이 어쩌면 이 아이에게 더 안 좋은 영향을 준 건 아닐까? 운명처럼 예견된 질병이라면, 아직 남아 있는 순이와 많은 시골 개들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질병의 위험을 시한폭탄처럼 껴안고 사는 것이다. 콩이는 이렇게 치료라도 받고 있지만……. 잠든 콩이의 얼굴 위에 다른 개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에게 무엇이 더 괜찮은 삶일까. 2년 동안 이현동을 오가며 아이들을 만났지만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할 그 마지막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커튼 밖에서 들어온 밤바람이 차다. 시골을 벗어난 콩이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는 순이와 친구들에게도, 거르지도 않고 매겨울은 고비다.
바람님의 이현동 시골 개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면 (Naverblog / bluemount337)
CREDIT
글·사진 바람
에디터 김기웅
본 기사는 <매거진P>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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