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 노견 생활기
찬란하라, 노견이여
수의사 양반, 내 개가 노령견이라니요
16살, 내 개 이뿌니의 대외적인 나이가 그렇다. 써놓고도 사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뿌니는 같은 견종에게서 많이 보이는 그 흔한 피부병이나 귓병, 습진으로 고생한 기억이 한 손에 꼽히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특별히 관리를 잘해준 것도 아니다. 타고난 체질이 한 몫 한다.
여느 때처럼 미용을 하러 동물병원에 갔다가 예정에 없던 이뿌니 건강검진을 진행했다. 평온한 마음으로 수의사 선생님의 ‘나이에 비해 아주 건강합니다’라는 문장을 기다렸는데, 내 귀에 들려온 것은 아주 낯선 단어들이었다. “보기보다 노화가 많이 진행됐네요. 백내장 초기, 디스크 소견도 있습니다” 그날부터 이뿌니는 갑작스럽게 노령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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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형에 가까워진 내 늙은 개
노령견 진단을 받고 드라마틱하게 변한 것은 없었다. 약을 좀 먹이고 동물병원을 자주 가게 된 것이 변화라면 변화다. 오히려 좋은 점도 생겼다. 옛날 외국 영화에서 보았던 한 장면, 벽난로 앞에 누워 포근하게 자는 느림보 털복숭이 개 코스프레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때 이뿌니는 정말이지 인근에서 알아주는 강아지였다. 악마견 2위라는 코커스파니엘과 살면서 지난 10년간 참 많이 싸우고 어르고 달래왔다. 개가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더 많이 친밀해졌다. 세상 둘도 없이 당차고 독립적이던 이뿌니가 내 손길을 요구한다. 사람으로 치면 어르신이 되어서인지 전보다 미묘하게 상냥하고 친절해졌다. 천둥벌거숭이가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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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도 놓지 못하는 것, 식탐
몇 년 전부터 이뿌니 사진을 무척 열심히 찍고 있다. 확실히 전보다 발랄함은 줄었지만 기쁘게도 식탐은 여전하다. 개가 나이가 드니 식탐 많은 것도 기쁘다. 이뿌니는 어떤 음식을 줘도 최선을 다해 먹는다. 먹방 장학생의 면모, 깨방정을 떨며 장난감을 물고 노는 모습, 아저씨처럼 드르렁 코를 골며 자는 순간까지 모두가 포토제닉하다.
반려동물을 키우다 보면 다들 사진작가가 된다더니 나도 마찬가지다. 함께 산책을 나가 계절의 변화를 보고, 느끼며 찍는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든다. 가을엔 단풍잎 사이로 달리는 이뿌니의 모습에 그저 찬탄한다. 모색이 브라운인 까닭에 가을풍경이 ‘찰떡’처럼 잘 어울린다. 그런가 하면 겨울엔 그 자그마한 발로 폭신폭신 새하얀 눈을 밟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가다. 겨울엔 눈이 와 있을까 아침마다 창문 너머로 날씨를 확인한다. 이뿌니는 눈을 무척 좋아하니 올 겨울 눈밭도 함께 걸어주겠지.
팔팔해도 노견은 노견이라 퇴행성 관절염과 디스크는 이뿌니의 친구가 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가벼운 산책으로도 충분히 계절감을 맛본다. 내 개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민감하게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강아지 덕에 밖에도 나오고 건강한 볕을 쐬며 신선한 공기를 흡입한다. 오늘도 누가 흘린 먹거리는 없나 코로 바닥을 쓸고 다니는 우리 바보개. 나와 이뿌니는 서툴고 삐걱거리던 초반을 지나 지금은 누구보다 죽이 잘 맞는 15년 지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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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 노견 생활기
그렇게 어느날 갑자기 '오늘부터 노령견'이란 명찰을 달고 산지만 3년째, 감사하게도 이뿌니는 여전히 내 옆에서 대체로 잘 지내고 있다. 담담하게 말 하지만 사실 동물병원에서 노견이라는 진단을 받은 날에는 무척 겁이 났다. 그 후로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평온하다. 언젠가 이뿌니의 차례도 올 것이다. 하지만 입버릇처럼 나는 말한다. “늙은 개는 쉽게 죽지 않아!” 그리고 속으로 말한다. ‘늙은 개와 사는 반려인도 쉽게 포기하지 않아!’
인정하니 오히려 편하다. 이뿌니는 노령견이고, 주변 아이들이 많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지레 겁먹지 않기로 했다. 노화는 일어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장 죽음으로 내달리는 것은 아니라고 믿기로 했다. 어느 순간 이름이 불리는 때가 오겠지만,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지만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기엔 현재가 너무 찬란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함께 라는 사실이다. 이뿌니와 나는 장난과 산책을 좋아한다. 어제도 좋아했고 내일도 좋아할 것이다. 우리는 명랑하다.?
CREDIT
글·사진 한진
에디터 이은혜
본 기사는 <매거진P>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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