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 안녕
종이가방에 전해진 작은 선물
SK텔레콤에서 뭐가 왔어?
은별이와의 만남은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찬바람이 쌩하니 부는 날에 문 밖에 나가봤더니 종이가방이 하나 있었다. 선물인가 하고 열어보니 병든 강아지가 담겨있었다. 쇼핑백에 들어있던 작은 강아지. 그 모습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은별이가 담겨있던 가방에 ‘SK텔레콤’이 쓰여 있었다는 것까지도 기억난다.
11월 이 차디찬 날씨에 어쩌자고 옷도 입히지 않은 작은 강아지를 유기했을까. 병원에 가보고 나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은별이는 선천적으로 피부병을 안고 태어난 데다 탈장까지 겹쳐 병원을 계속 들락거려야 하는 아이였다. 그렇게 은별이는 생후 2개월 만에 유기견이 되었다.
내게는 강아지 알레르기가 있었고 당시의 남자친구는 실내견을 키운다는 개념조차 없던 사람이었다. 키우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내 뒤통수를 잡아 끈 한마디. “이런 아이들이 안락사 1순위예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은별이를 안고 집에 돌아와 있었다. 사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12년이 지나 있었다.
너 빼곤 다 바뀌어도 돼
매일 산책을 했을 뿐인데, 매일 꽃을 보고 낙엽을 보고 눈을 함께 보았을 뿐인데. 왜 12년이 흘러버린 걸까. 시간은 공평하다는데, 개와 함께하는 시간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향할 곳 없는 심통이 난다. 그동안 알레르기로 입원까지 해가며 개 키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던 남자친구는 남편이 되었고, 남편은 은별이가 없으면 잠을 청하지 못하는 ‘개바보’가 되었다.
12년 동안 나도 남편도 참 많이 바뀌었다. 파릇한 청춘이 중년의 부부가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신기하게도 알레르기는 갈수록 약해졌다. 만들 줄 아는 강아지 간식이 많아졌고, 산책은 가장 중요한 하루 일과다. 그대로인 것은 은별이 뿐인 것 같다. 은별이 빼고는 모든 것이 바뀌어도 괜찮았다.
발 맞춰 걷는 걸 좋아하던 은별이는 이제 아빠 팔에 안겨 산책하는 것을 선호한다. 때로는 산책보다 햇살 바른 곳에서 한숨 자는 걸 더 즐기기도 한다.어느 날엔가 윤기를 잃은 털을 빗질해주다가 덜컥 겁이 났다. 소녀 같던 은별이 어깨에 언제 이렇게 세월이 내려앉아 있었던 것일까. 그 때부터 좀 더 부지런해지기 시작했다. 은별이에게 세상을 더 많이 보여주고 싶어서. 그 핑계로 은별이 모습을 카메라에, 우리 눈에 많이 담아두고 싶어서.
거기에 네가 있었다
올해 초,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우울증이 찾아들었다. 이별이 믿기지 않았고, 상실을 또 겪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한동안 잠으로 세월을 보냈다. 어쩌다 잠에서 깨 눈을 뜨면 멀거니 천장을 보곤 했다.
그 날도 그랬다.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은별이의 까맣고 반질반질한 단추 같은 눈과 눈이 마주쳤다. 너는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자주 내 침대 옆을 지키고 있었던 것일까. 비로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여전히 헤어짐이 두렵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 더 많이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날 수 있었다. 내년에는 캠핑카를 살 생각이다. 거동이 불편해지는 은별이를 위해 편한 여행을 물색하다 결심했다. 돌이켜보니 12년 전 SK텔레콤 종이가방에 들어있던 것은 선물이었다. 충만한 애정과, 덤으로 피부병을 달고 있던 내 작은 선물.
CREDIT
글 사진 김순애
에디터 이은혜 ?
본 기사는 <매거진P>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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