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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견 이야기 | ③ 넌 여전히 최고의…

  • 승인 2017-08-25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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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견 이야기

③ 넌 여전히 최고의 개야, 도로시

사박사박. 이건 엄마 발자국 소리. 대문을 열고 들어와 마당 모래를 밟을 때 난다. 삭삭. 이건 윤슬이 걸어오는 소리. 아빠는 언제 올까. 귀를 쫑긋거리며 도로시는 몸을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데, 디스크로 마비된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앞발로 간신히 지탱하고 섰다. 고개를 쭉 빼고 베란다 창문 밖을 바라봤다. ‘역시 내 귀는 틀리지 않았어’ 엄마와 윤슬이가 현관문을 열고 있다. 장을 보고 돌아온 둘에게 도로시가 인사를 건넨다. “어때? 오늘도 참 좋은 날이야.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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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엔 천둥 번개가 쳤다

하늘이 섬광을 던지며 목 놓아 울 땐 꼭 산이 무너질 것만 같아 도로시는 기분이 영 별로다. 한창 재난구조견으로 활약할 때의 기억이라도 떠오를라 치면 심기가 더욱 불편해진다. 도로시는 여느 골든 리트리버보다 강한 체력을 타고나 구조견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출동 전화벨이 울리면 어김없이 달려 나갔다. 울퉁불퉁한 산길도 마다 않고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찾아 나섰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한다는 생각에 조금 울적해지는 것이다.

캄캄했던 거실이 번쩍, 순간 밝아지며 윤슬이의 비행기 장난감이며 동화책 같은 것들이 망막에 잔상을 남기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때마다 분홍색 펜스는 거실 바닥에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평소엔 얌전히 펜스 안을 지키던 도로시였지만 이런 날씨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마음속에서 북받친 초조함과 불안함에 펜스를 코로 흔들고 말았다. 도로시 앉은키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펜스는 처음부터 가둘 생각 따윈 없었던 것처럼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개는 움직이지 않는 하반신을 끌고 거실 구석으로 가 커다란 몸을 웅크렸다. 태어나고 3개월이 지나서부터 훈련을 받았지만 세월은 도로시를 손쉽게 무너뜨렸다. 이번에도 괜히 응석을 부리고 싶어 날이 밝도록 거실 구석에 있기로 했다. 열다섯 살 나이가 도로시를 도리어 강아지로 만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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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서 이렇게 있는 거야? 애기 다 됐네.” 아침에 이 광경을 목격한 윤슬이 엄마는 개 등을 톡톡 두드리고는 쓰러진 펜스를 일으켜 세웠다. 화장실까지 가기 힘든 도로시를 위해 펜스 안쪽에 배변 패드를 깔고 개를 앉혔다. “밥 먹어야지? 살찌면 앞다리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까 오늘도 조금만 먹기다.” 건강을 위해서 하는 제한 급식이지만 윤슬이 엄마의 마음은 늘 불편하다. 더욱이 간밤 혼자 떨었을 도로시 생각을 하니 더욱 심란했다. ‘이따 윤슬이더러 간식을 조금 챙겨주라고 해야지.’

안쓰러운 마음에 개의 이마를 쓸어 올리자 그 속을 알아챈 건지 도로시 눈이 반달모양으로 휘어졌다. 엄마가 가족들 아침 준비를 하러 부엌으로 향했지만 도로시 얼굴에 미소는 떠나지 않았다. 당근을 통통 써는 칼의 움직임이며 프라이팬 가장자리에 톡 부딪히는 달걀까지, 개는 부엌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하나라도 놓칠 새라 기웃기웃하며 바라봤다. 조금씩 퍼지는 맛있는 냄새에 잠이 깬 윤슬이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유치원 갈 준비보다 밥이 먼저인 꼬마 아가씨다. 아빠는 전날 출동해서 돌아오지 않아 윤슬이와 엄마만 조촐하니 식사를 시작했다. 바라보는 도로시의 입에 침이 한가득 고였고, 눈은 또 반달을 그렸다. 평화로운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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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동 요청은 이제 없다

깜빡 잠이 든 도로시는 꿈을 꿨다. 1세대 재난인명구조견으로 한창 활약하던 때의 기억이다. 개는 2살까지 훈련을 받고 2001년부터 구조견이 되었다. 현장에 투입돼선 조난자를 찾아 수색대에게 알리는 일을 했다. 2002년 태풍 루사가 휩쓸고 간 강원도 삼척, 동물 사체와 쓰러진 나무들이 뒤섞인 가운데서 용케 시체를 찾아 공을 세운 일도 있었다. 장하다며 있는 힘껏 안아주는 교관 품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었다. 빛나는 순간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날의 꿈을 꿨다.

이른 아침, 구조견 협회를 통해 도로시의 반려인이자 훈련사인 현광섭 교관에게 신고가 들어왔다. 근처 마을에 노인이 실종됐다고, 산 너머 옆 마을로 간다더니 24시간이 다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고 했다. 도로시는 진지하게 통화를 하는 아빠를 올려다봤다. 심각한 얼굴에서 출동 신호를 읽었다. 사건이다. 신난다. 현 교관 손에 이끌려 현장으로 향했다. 꿈이 늘 그렇듯 어떻게 왔는지 모르게 사고 추정 장소에 도착했고 추적을 시작했다. 코를 하늘로 향했다가 땅으로 내렸다가. 노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 곳곳을 샅샅이 수색했다. 찾았다! 도로시는 냄새가 이끄는 대로 달렸다. “영감님! 괜찮으…….”

아빠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얼굴이 빨개진 채 마을 어귀 평상에 누워 있었다. 옆에는 빈 막걸리병과 양은사발. 아빠는 헥헥거리는 도로시를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애써 구조하러 왔건만 이렇게 황당할 수가. 그래도 도로시는 마냥 즐거웠다. 진짜 구조자이든 아니든 사람을 찾으면 언제나 보상을 받아 그렇기도 했지만 산과 들을 뛰어다니는 게 마냥 기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 늘 사람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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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제일은 두말할 나위 없이 가족

아빠와 집으로 돌아오는 꿈속에서 도로시는 꼬리로 원을 그렸다. 그 어떤 개보다 크게, 사랑하는 마음만큼 커다랗게. 그러다 너무 격했는지 잠에서 깨버렸다. 윤슬이와 엄마는 여전히 식사 중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엉덩이에 힘을 주어 보았지만 꼬리는 무반응이었다. 그럼 그렇지 흥, 하고 콧바람을 내곤 문득 자신의 생을 돌아보았다. 젊었을 적 기억이 나서인지 괜히 감상에 젖었다.

10살에 은퇴해서 평범한 개로 산 지가 벌써 5년이다. 먼저 간 동료들을 떠올렸다. 구조견 활동을 함께 시작했던 여덟 마리 전부 세상을 떠나고 도로시만 남았다. 그동안 개나리를 닮아 노랗던 털은 안개꽃처럼 하얗게 세어 버렸다. 할머니라고 불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노쇠하고 다리에 힘은 사라졌지만 얼굴에 함박웃음은 그대로다. 변함없이 곁을 지켜주는 윤슬이 가족이 위로가 됐다.

“도로시! 간식 줄까?” 꼬맹이가 조그만 손 한 움큼 과자를 쥐어 건넸다. 개는 움직이지 못하는 꼬리 대신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이내 간식을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오늘은 아빠가 올까?’

다시 눈을 감았다. 하늘은 지난밤 궂은 날씨를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뗐고 햇살은 하얀 도로시를 따뜻하게 비췄다. 엄마, 아빠, 윤슬아. 있잖아. 오늘도 참 좋은 날이야. 그치??

노령견 이야기

① 마침내 해피엔딩

② 노령견을 보내는 시간

CREDIT

이청

사진 박민성

자료협조 신비로 애견학교

본 기사는 <매거진P>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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