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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의 추억

  • 승인 2017-07-24 1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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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보신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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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여 고기를 먹어라

작전명 개고기 먹이기. 주모자는 할머니였고 가족과 친척들은 별 거 아니란 듯 무심히 고개를 돌리거나 짐짓 웃으며 의심을 없애는 역으로 합세했다. 대상은 나를 포함해 유년기에 접어든 세대들. 그중 나는 RPG 게임의 슬라임에 준하는 손쉬운 타깃이었다. 그저 소고기라 슬쩍 속이고 밥숟가락 위에 얹어주면 야무지게 먹었으니까. 한 그릇 뚝딱 거나하게 먹고난 뒤에야 실실대는 고모부의 얼굴을 봤지만 그 또한 나처럼 포만감에 젖어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감각이 예민하고 입이 짧은 사촌 동생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처음 보는 고기를 강아지처럼 냄새 맡더니 신중히 고개를 저음으로써 모두의 실망을 샀다. 작전은 물 흐르듯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근래 셰프들이 등장하는 TV프로그램에서 고기 잡내를 없애는 쏠쏠한 비기를 알려주는데, 이미 그 분야에서 우리 가족들은 마스터 셰프 코리아였다. 식탁 위 마늘과 파, 쌈채소를 수북이 올려 고기를 완전히 가렸음에도 동생이 입을 대지 않자, 주방으로 가 커피가루며 후추를 뿌려 새 쟁반을 내어왔다. 동생은 질감만 남은 고기를 고든 램지의 표정으로 씹어 삼켰다. 그런 이상한 의례를 거쳐 우리는 소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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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 밤의 보양 파티

때는 흘러 대학 시절. 어느 여름 교회의 하계 수련회에 참석했다. 산 넘고 물 건너 한나절을 꼬박 이동해 도착한 남해의 어느 섬. 신도들은 속세를 벗어난 수련회장에서 모든 구멍으로 물기를 쏟아내며 참회의 시간을 보냈다. 나 또한 무슨 죄를 그리 저질렀는지 질세라 소리 지르며 회개했던 기억이다. 3박 4일 간 몇 번의 예배와 기도, 귀신들림과 기적의 현장을 목도한 후 지칠 대로 지친 성도들은 마지막 날 밤 개고기 파티를 벌였다. 개고기 파티를, 말이다. 이 파티는 수련회의 전통이자 대망의 하이라이트였다.

사실 파티 전 날, 그날따라 칠순이 넘은 선교사님이 수련회장에서 보이질 않자 나는 수색대를 조직해 섬 곳곳을 뒤졌다. 평소 교내 도덕과 신앙의 중추였던 선교사님은 낡은 오두막 옆 흙길 위에서 웃통을 깐 채로 발견됐다. 그는 거대한 샌드백 같은 걸 몽둥이로 개 패듯 패고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사실은 개를 샌드백 패듯 패는 거였다. 우리는 <곡성>에서 악마로 변하고 만 주인공을 본 신부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줄행랑을 쳤지만 다음날 그의 옆에서 맛있게 개고기를 뜯었다. 어쨌거나 우리도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보신의 추억을 넘어

정말 개고기를 먹고 원기가 회복됐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떤 ‘전통’에 따라 ‘물 흐르듯’ 먹었던 것이라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지금은 개고기를 일절 먹지 않으며 믿거나 말거나 완전한 개 식용 반대론자로 돌아섰는데, 야무지게 개를 씹던 그때와 지금 사이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해보면 할 말이 궁하다. 분명 그때는 프랑스 배우 브리짓 바르도를 발라 버리던 손석희에게 양 엄지를 들어 줬는데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엔 별 드라마가 없다. 다만 조금 더 알았을 뿐이다. 물 흐르듯 내려오는 풍습을 지탱하기 위해 이 동물이 얼마나 무참한 수모를 당하는지를 말이다. 그 학살은 야만에 가깝고, 과정 중 하등의 존중이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실로 엄청난 규모이기에, 당신이 그 사실을 정확히 알기만 함으로도 개를 먹는 것에 대해 멈칫할 것이라는 확신이 내겐 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성찰을 신념으로 확장하기 위해 넘어야 할 것은 거의 모든 우리가 지니고 있을 보신의 추억이다. 인생의 언젠가에서 개고기를 먹었어도, 부러 그것을 숨기지 않아도, 개고기를 거부하는 당신의 의지는 귀하며 투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싶다.

CREDIT

에디터 김기웅

그림 권예원?

본 기사는 <매거진P>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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