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따뜻한 여름의 초입
강아지와 산책을 준비하는 당신께
ⓒ 박애진
산책길에는 리드줄을 하나 잡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질감이 달라진다. 산책길의 풍경, 만나는 생명들, 그리고 행복에 겨운 발걸음을 걷는 내 강아지까지. 그리고 평소와는 조금 다른 마음을 하게 되는 반려인 스스로도. 강아지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산책길을 상상하며 곱씹어주기를 희망하는 네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철학VS철학
강신주, 2010
우리는 모두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책을 철학사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게, 강신주는 각 주제를 두고서 동양의 현대 철학자와 서양의 옛 철학자를 대립시키며 주제에 대한 상반 된 의견을 내보이기도 한다. 동서고금을 가로지르는 철학자들을 둘씩 짝 지어 인류가 절대 정답을 내리지 못할 난제에 ‘대답’을 하는 식으로 저술 한 책. 어쩌면 좀 고약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한 이 책은 그래도 독자가 철학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견지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이드가 되어 주고는 한다.
언젠가 고향집의 덩치 큰 강아지와 산책을 나섰을 때 길을 잃었던 생각이 난다. 하필이면 모르는 동네에서, 처음 보는 노인에게 “왜 이 큰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냐,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는 타박을 받았다. 화가 나지만 노인을 공경하자는 마음가짐으로 고개를 숙였어야 했을지- 인간 대 인간으로, 당신은 비합리적인 태도로 나와 내 반려견의 권리를 훼손하고 있노라고 말했어야 했을지. 우물쭈물 생각하는 사이 나와 내 옆으 로 노인은 혀를 쯧쯧 차며 지나갔다. 후자를 선택해야 했다는 건 집으로 돌아오면서야 간신히 알았다.
어쩌면. 내가 ‘정답이 없으니, 중립적인 마음으로 읽자’고 대했던 이 책 을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의 대답을 했었더라면. 인간 근본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면서도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예시를 생각하며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미리 정해놓았더라면. 그렇다면 나는 무례한 언행으로부터 내 강아지를 위해 항변이라도 할 수 있는, 산책길의 든든한 동반자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글 김나연?
이사(移徙) Move
윤상 4집 <이사>, 2002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없을 때… 산책을 나서는 이유
한 곳에 오래 못 있겠다. 이따금 거처를 옮기며 새로운 공기를 마셔야 한다. 푼돈을 모아 잠시나마 해외로 나가거나, 하다못해 고시원에라도 기어 들어가 칩거했다. 그렇게 새로이 시작해야 한 발짝이나마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리셋 증후군이다. 윤상의 ‘이사’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전부 가져가기엔 너무 무거운 너의 기억들을 조금 남겨두더라도 나를 용서해.’ 내겐 이 말이 조금 치사하게 들린다. 외려 남겨두고 갈 수 있기 에 터를 자리를 옮기는 거니까. 버린 자리가 나야 비로소 새로운 것을 채워 넣을 수 있으니까.
몇 년 전, 강아지를 반려했을 때만 해도 내 삶에 역마살 같은 건 끼어들지 않았다. 부정적인 감정이 차오를 때마다 딱 그만큼 버려내는 노하우가 그때의 나에겐 있었다. 방법은 잠시간의 외출, 강아지에겐 산책이었다. 강아지에게 목줄을 채우고 현관을 나서며 맡는 공기는 나날이 달랐고 나는 수분과 온도의 차이, 바람의 세기 따위를 충분히 분간하며 즐길 줄 알았다. 마음 곳곳에 닫혔던 창문은 활짝 열어 환기했다. 무책임한 자유 속 에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그 시절엔 없었다. 그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치지 않았던 건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일말의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어디론가 떠나고픈 사람이 있다면, 지난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잠시라도 좋으니 강아지와 이기적인 산책에 나서자. 강아지와 걷긴 해도 가끔은 당신을 위한 시간으로 쓰면 좀 어떠나. 그럼에도 리드줄 을 꽉 잡아야 하는 건 강아지의 안위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당신의 삶을 지속할 최소한의 의지이기에 그렇다. 강아지를 위해서든 당신을 위해서든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글 김기웅?
허니와 클로버 ハチミとクロ?バ?
우미노 치카, 200
“다 같이 도시락 싸가지고. 카메라도 가지고. 사진도 많이 찍고. 틀림없이 엄청, 재미있을 거야.”?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초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꿀과 클로버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 구절에 착안하여 진행되는 영화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있는 초원을 ‘청춘’에 비유하며 청춘을 구성하는 꿀과 클로버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물론 등장하는 주인공들에게 초원이란 푸르른 청춘 그 자체다.
작품 속에서 다루는 미대생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울며 웃으며 고뇌한다. 그림의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라이벌에게 이길 수 없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닿을 수 없어서. 나는 청춘을 논하기엔 조금(?) 늦었으므로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 대입하며 이야기를 감상했다. 그리고는 이윽고 내 인생을 이루고 있는 커다란 두 가지 요소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더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우리 집 개린이들이 아니고 무엇이랴.
주말마다 강아지들과 산책을 나설 때면 생각한다. 한없는 순수함을 품고 있었던 청춘시절과 강아지들을 앞에 마주한 지금의 내 모습이 비슷하다고. 또한 감동한다. 꿀보다 농밀하고 클로버 잎보다 가슴 뛰는 것들과 내가 함께 하고 있음에. 추운 날씨가 걷히고 따사로운 햇살이 온 땅 위에 만연하게 되면 나는 아마도 조금 더 전율하게 될 것이라 예감한다. 이미 지나쳤다고 생각했던 초원 위를 사실은 여전히 강아지들과 함께 뛰어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글 장수연
나의 아저씨 Mon Oncle
자크 타티 감독, 1958
고급스러운 쿠션, 좋은 장난감보다는 그대와 함께하는 시간?
세련된 디자인 가구와 갖가지 자동시스템으로 꾸며진 만능주택에 살고 있는 한 부부가 있다. 그들은 호화로운 저택에서 사회적 입지에 걸맞은 문화적 삶을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집의 외동아들은 남모르게 자신의 환경에 불만을 품고 있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이 공 간은 그저 갑갑하고 지겨울 뿐이다. 그에겐 독특한 삼촌이 하나 있는데 그가 바로 영화의 주인공 ‘윌로’ 씨이다. 그는 어수룩하고 엉뚱한 사람이 며 덩굴과 이끼가 감싸 안은 건물과 시끌벅적한 시장, 동네 꼬마 친구들 과 떠돌이 강아지들 속에서 함께 살고 있다. 소년은 자신의 환경과 판이 하게 다른 삼촌의 세계에 매료된다.
우리는 그래도 아직 스스로가 순수한 편이라고 믿고 싶지만,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윌로 씨 보다는 소년의 부모님의 가치관으로 생각하고 행 동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양육하는 대상에게 좀 더 좋은 걸 먹이고 고급스러운 쿠션에서 재우지 못해서 미안하고, 좋은 장난감을 사주지 못해 아쉬워하기도 한다. 정작 그들이 원하는 건 대단한 게 아닌데 말이다.
대부분의 반려견은 윌로 씨와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게 무엇보다 행복한 소년과 닮아 있을 것이다. 강아지들은 잔뜩 갖춰진 공간보다도 그저 함께 누리는 ‘자유’를 원한다. 네 발로 마음껏 흙을 밟고 넓은 곳을 달리며 풀 냄새를 맡는 즐거움과 그걸 나눌 수 있는 반려인만 곁에 있다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반려견이 행복하길 원한다면 큰 욕심 부릴 필요 없다. 흥행 영화나 멋진 전시회는 잠시 미뤄두자. 이번 주말, 배변봉 투와 물통, 간식을 챙겨서 반려견과 함께 교외 나들이를 나가보는 건 어 떨까?
글 우서진
CREDIT
에디터 김나연
사진 엄기태
본 기사는 <매거진P>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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