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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사람들 | 벤과의 5600일

  • 승인 2017-06-05 10: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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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 LOSS : 남겨진 사람들

벤과의 560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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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7개월을 함께

2016년 3월, 주문진 수산시장. 때가 잔뜩 낀 잿빛 말티즈가 갓길을 활보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유기견. 몇 주 이상 거리를 쏘다닌 듯했다. 녀석은 성치 않은 눈으로 느릿느릿 차도를 건넜다. 그때 승합차 한 대가 달려왔다. 강아지가 건너고 있다는 내 손짓을 본 걸까. 차는 급히 섰고 녀석은 무사히 인도에 올랐다.

2015년 8월, 경기 광주에 있는 집에서 막내 벤이 사라졌다. 15년을 함께했지만 집을 나간 건 처음이었다. 벤은 계단을 타고 1층 자동문을 지나 유유히 탈출했다. 녀석을 찾기 위해 뙤약볕 아래 장장 3시간을 헤멨다. 벤은 그날 온 가족의 혼을 쏙 빼놓고는 해가 지기 전 돌아왔다. 그리곤 3개월 후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났다.

주문진에서 만난 유기견도, 벤도 말티즈였다. 주문진에서 유기견을 본 후, 장례를 치르고 넉 달이 지난 벤이 다시 떠올랐다. 돌아온 직후 일기장을 다시 폈다. 한 해 전, 벤의 허리가 굽을 무렵 쓰기 시작한 일기였다.

제목은 ‘벤과의 5600일’. 녀석이 엄마 외투 주머니에 담겨 온 2000년 4월부터 말년의 2015년 11월까지 시간을 헤아려 보니 5600여 일이었다. 벤과 함께 한 5600여 일 동안 나는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쳤다. 첫 회사에 들어갔고 이직도 했다. 강릉에서 용인으로, 그리고 광주로 이사도 네 차례나 했다. 어느 집에서든 녀석은 쉬할 곳부터 찾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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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아른거리는 짖음 소리


으렁 으렁, 와릉 와릉, 멍멍, 컹컹, 캥, 호오오올…. 내게 익숙한, 내가 알아들은 벤의 소리들. 택배 아저씨가 오면 벤은 그렇게나 짖었다. 커다랗고 둥근 풀페이스 헬멧이 나타났다 하면 질겁했다. 그때 내던 소리는 달랐다. 짧고 묵직하게, 그리고 꾸준히 짖는다. 워- 워- 워-. 이마엔 주름이 잡히고 잇몸을 보인다.

우물거리듯 중음으로 소리도 기억한다. 머리를 낮추고 양 발꿈치를 바닥에 댄 채 허리를 높이 올리고 꼬리는 쑤욱 올린다. 그리곤 기세 좋게 오른쪽 왼쪽으로 뛰고, 다시 유인한다. 애견인이라면 금세 알아챘겠지만, 같이 놀자는 표시다. 녀석이 털을 곤두세울 때, 배를 뒤집을 때, 먹이를 달라고 조를 때 내던 소리는 다 달랐다.

까닭 없이 짖는 개는 없다. 어쩌면 이 뻔한 사실을 알기 위해 지난 십수 년의 추억을 헤집었다. 녀석은 난 대로 제 어미에게 배운 대로 짖었을 뿐인데, 그걸 몰라 네 식구가 달려들기도 여러 번. 빈 물그릇을 덜그럭대던, 닭고기 삶는 냄새에 컹컹거리던, 아빠를 기다리며 끙끙대던, 이젠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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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0일이 내게 남긴 것


1. 매해 함박눈이 나리면 벤과 어지러운 발자국을 남기고 녀석을 뜨신 물에 씻겼다. 강릉 단오장이 열리면 남대천변을 함께 걸었다. 집 나간 녀석을 찾으러 반나절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지난 15년 7개월을 달리 채운다 한들 녀석과 보낸 시간만큼 밀도가 있었을까. 벤이 없었다면, 그 시골에서의 내 유년은 그저 성긴 시간이었겠지. 녀석이 즐겨먹던 소시지 하나, 닭고기 통조림 하나가 내겐 희미한 그 해의 곳곳을 채운다.

2. (다른) 개를 키울까 망설이는 내게 벤이 알려준 것. 개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사료를 채우고 털을 깎이고 욕조에 더운 물을 받는 것만을 뜻하진 않는다. 규칙적인 산책과 식생활 조절(개에게 줘선 안 되는 음식, 가령 양념이 잔뜩 묻은 치킨을 달라고 조르는 녀석을 달래는 어려움이란..)은 필수다.

나는 지난 11월 <당신은 개를 키우면 안 된다> 라는 책을 읽고서 너른 거실에 개가 누워 있는, 그런 장면은 더 이상 떠올리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개를 15년 이상 키우고 든 생각이 고작 ‘개를 키우지 말아야 겠다’라니. 벤과 함께하며 개를 온전히 알고 오롯이 애정을 쏟는 게 버거운 일이라는 걸 알아서,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녹원마을에 잠든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너와 함께여서 나의 십대, 이십대와 삼십대의 몇 해가 덜 외로웠다고. 안녕.


CREDIT

?글 신성헌

그림 지오니

에디터 김나연?

본 기사는 <매거진P>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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