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강아지도 어릴 때 아주 예뻤다. 요크셔테리어의 까만 털이 통통 움직이는 모습이 앙증맞기 그지없었다. 온몸의 까만 털 때문에 이름을 '검둥이'로 지을 뻔도 했는데(당시 중학생이었다), 그러지 않기를 다행이었다. 1살이 되면서 어린 시절의 까만 털은 없어지고 온몸이 은빛으로 변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부터 사진으로 많이 담아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당시에는 디지털 카메라도 흔하지 않고 휴대폰 카메라도 없었다. 그래서 아기 시절의 새까만 모습은 그때 필름 카메라로 몇 장 찍어둔 사진 속에만 남아 있다.
지금의 우리 개는 객관적으로 말해서 그리 예쁘지 않다. 털이 푸석푸석해지고 느낌상 숱도 좀 적어진 것 같다. 한쪽 눈은 녹내장이 와서 하얗고 다른 쪽 눈도 조금씩 백태가 끼고 있다. 언젠가부터 집에서 셀프 미용을 하게 되어서, 그때그때 티 나게 다른 털 길이도 외모 하향에 한몫하고 있다. 하지만, 귀엽다. 예쁘지는 않지만 여전히 작고 귀엽다. 늙어도 귀여울 수 있다는 건 그래도 축복이지 않을까?
우리 개가 어렸을 때, 마찬가지로 어렸던 나는 개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려웠다. 강아지는 1살, 나는 15살이었다. 체육 시간이 제일 싫은 체력 부족 소녀였던 나는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것이 언제나 숨 가빴다. 산책 훈련이란 게 있는 줄도 몰랐고 알았더라도 아마 시킬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 같다. 강아지는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바로 계단으로 질주했고, 나는 목줄을 놓치거나 내 속도가 느려 목을 잡아채게 될까봐 최대한 전력질주를 해 강아지의 속도를 따라잡았다. 내가 빨리 뛰면 강아지는 더 빨리 뛰었다.
그리고 이제 처음 만났던 그때의 내 나이가 된 강아지는, 그때의 나처럼 느릿느릿해졌다. 계단 앞에서는 어린 아이가 걸음마를 처음 배우듯 차근차근 한 계단씩 오른다. 나는 이제 멀뚱히 서서 그 걸음을 기다려주거나, 안아서 올려주는 역할을 맡았다. 나름대로 네 개의 다리를 바쁘게 움직여 종종거리며 걷는데, 내가 걷는 만큼의 속도도 나오지 않아 나는 더 느리게 걷게 되었다. 예전엔 강아지가 나를 산책시켰는데, 지금은 강아지 산책이 나에게는 걷기 운동도 되지 않는다.
느려진 건 걸음뿐이 아니다. 간식을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나도 뛰어오던 강아지가 지금은, 먹을 것을 눈앞에 들이밀어도 재빠르게 발견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 여기 먹을 거 있어. 하얗게 백태가 낀 눈이 아닌 다른 쪽 눈앞에 대고 흔들어야 날름, 간식을 받아먹는다. 현관문 소리도 잘 듣지 못해 가족이 온 걸 느지막이 알아차리고, 내가 집에 들어오고 한참 후에서야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어준다. 그래, 나보다 몇 배나 빠른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는 모든 게 좀 느려질 만도 한 것 같다. 대신 내가 속도를 늦춰주면 되니까.
얼마 전, 꿈에 강아지가 나왔다. 무슨 꿈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꿈에서 울다가 깨어났다. 신랑이 내가 잠꼬대로 강아지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다고 했다. 뭐 개가 나왔으니 개꿈이겠지만, 뻔하다. 나는 내 개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불안하고,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늘 부족하다. 후회는 언제나 늦다는 걸 아니까…. 한 번은 며칠간 여행을 갔는데 불현듯 무슨 촉이 느껴져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다. 강아지는 뭐해? 그런데 오늘따라 엄마도, 동생도 답이 없었다. 혹시 나 없는 사이에 개가 갑자기 아프거나, 긴박한 상황이거나… 그런 건 아닐까? 그럼 빨리 일단 공항으로 달려가서… 짧은 시간 동안 이 가능성, 저 가능성에 기웃거리며 머리를 굴려봤으나 나의 촉은 근거도 없고 부질도 없다는 것이 이내 밝혀졌다. 강아지는 멀쩡히 잘 있었다. 나는 종종, 그러나 예전보다는 자주 불안하다.
다행인 건, 이제 봄이라는 것이다. 따뜻한 햇볕을 쬐고 풀 냄새를 맡으며 걸을 수 있는 봄. 우리에게는 또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어갈 기회가 펼쳐져 있다. 예쁘진 않더라도 예쁜 걸 함께 볼 수 있는 지금 이 시간, 이제 매 순간 우리에게 중요한 건 바로 그거다.
CREDIT
글 지유
그림 우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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