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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견과 살아가기

  • 승인 2015-10-15 15: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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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견과 살아가기
내 개가 늙었다는 걸 인정하는 것

인정하게 되는 순간은 갑자기, 느닷없이 왔다. 강아지의 한쪽 눈 안쪽에 투명한 뭔가가 생긴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뿌연 막이 눈을 뒤덮었다. 병원에 데려가니 녹내장이라고 했다. 당시 강아지의 나이가 열네 살, 나이가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이며 더 진행되지 않도록 늦추는 방향으로 약을 처방해준다고 했다. 다른 한 쪽도 얼핏 희미한 기운이 보이는 것 같기는 했지만 다행히 아직은 괜찮았다. 나는 진찰 받고 설명을 듣는 동안에 얼굴에 휴지를 다 묻혀가며 펑펑 울었다. 어디 죽을병이 걸렸다는 것도 아니고 위험한 수술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서럽게 우는 게 얼마나 유난스러워 보일까 하고 눈물을 억누르면서도 그때는 주체할 수 없었다. 내 강아지가, 늙었다니.

지유 일러스트레이션 양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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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 강아지를 처음 집에 데려왔을 때, 이 작은 생명체도 언젠가 늙는다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너무 먼 일이라서 늙음이 뭔지 잘 몰랐고 관심이 없었다. 늙는다는 것이 이별이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당연한 이치를, 나만 빼고 모든 게 엉망진창으로 보이는 중2병이 한창이던 내가 알았을 리 없었다.

병원에 다녀온 강아지는 한쪽 눈은 뿌옇지만 다행히 평소처럼 활기차게 걷기도 하고 밥도 잘 먹었다. 산책을 시켜주다 보면 새삼스럽게, 더 많은 걸 느끼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물끄러미 떠오른다는 사실만 나에게 생긴 변화였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바닷가 모래를 밟을 수 있게 해줬다면, 계곡의 요란한 물소리가 시끄럽게 귀를 때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줬다면 좋았을 걸.

실은 나도, 청소년기와 대학 시절을 보내며 성장하느라 바빴다면 핑계일까? 강아지의 시간이 나를 거쳐서 이미 저 멀찍이 앞서 나아갈 줄, 처음부터 온전히 알지 못했던 탓이다. 내가 바삐 어른이 되는 동안 내 개는 잠자코 차곡차곡 나이를 먹어 할머니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얼굴이 달라졌다. 7, 8살 무렵까지만 해도 산책을 나가면 다들 ‘동안’ 강아지라고 했는데 이제 제법 나이가 느껴지고 털도 다소 거칠어졌다. 나이 먹었어도 여자이니 못생겨졌다는 표현만은 하지 않을 테다. 어릴 때 제대로 산책 훈련을 시키지 못해 항상 전속력으로 달려야만 속도를 맞출 수 있었는데, 이제 내 강아지는 질주하지 않는다. 나는 평소 혼자 걸을 때와 비슷한 속도로 강아지를 산책시킬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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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잘 때도 침대 위에 올라오지 않는다. 항상 침대 위에서 같이 잠을 잤었는데, 언제부턴가 침대 밑에서 고개만 들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했다. 14년 동안 한 방을 쓴 우리는 서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 나는 자기 전에 강아지를 침대 위에 들어 올려주곤 했는데, 언제부턴가는 아예 침대 밑에 있는 자기 집에서 자는 것이 편해진 것 같았다. 나와 살을 붙이고 자지 않는 것이 나는 내심 섭섭했다. 너 거기서 잘 거야? 철딱서니 없게 징징대는 언니를 시크하게 무시하는 것만은 나이를 먹어도 변함없었다.

집이 2층이라 바깥의 차 소리나 말소리가 잘 들리는데, 아파트 입구에만 가족이 도착해도 벌써 현관 앞으로 나와 꼬리를 흔들던 아이가 이제 집에 누가 들락거려도 잠에서 잘 깨지 않는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 나 왔어, 하고 아는 체를 하면 그제야 벌떡 일어나 반갑다는 듯이 이리저리 뛰고 꼬리를 흔들었다. 그나마도 사실 요즘은, 어어, 왔어? 하고 보는 둥 마는 둥 한다. 네 가족이 오고가는 걸 일일이 체크하기엔 기력이 달리는 모양이다.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할 때 늙고 힘없는 노령의 모습까지 떠올리기는 어렵다. 나이 먹은 개는 돌보는 손길이 더 많이 필요하다. 손길보다도 중요한 건 자꾸자꾸 들여다보는 관심이다. 강아지를 키운다는 것은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늙고 힘없고 어쩌면 병들었으며 매우 비싼 치료비가 들기도 하는, 그런 시간을 통틀어 약속하는 일이다. 그리고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시간에 이제는 닿은 것 같았다. 나도 그만 내 개가 늙었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늙음이라는 시간은 아마 내 강아지와 닮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생생한 색채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한 말 없는 믿음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무엇이리라. 여기저기 닳아버린 몸에 덧대어지는 것은 새로운 세포가 아니라 그런 추억과 애정일 것이다. 남은 시간이 지난 시간보다 길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중요한 건, 그러나 지금도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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