펫찌로고

늘그막에 찾아온 내 가족

  • 승인 2015-02-02 17:11:45
  •  
  • 댓글 0

늘그막에 찾아온 내 가족
길음2동 사회복지견 기르미

성북구 길음2동에 사는 81세의 독거 노인 이판례 씨에게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다. 사회복지사에게서 ‘이번엔 기르미도 함께 찾아뵐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섬주섬 아침상을 차리고 TV를 켜 늘 보던 연속극에 채널을 고정시켰다. 밥 한술 위에 김치를 얹어 입 안에 넘기면서도 틈틈이 인기척을 살피며, 네 발로 뛰어올 반가운 손님을 기다렸다.

이수빈 사진 박민성 자료협조 길음2동 주민센터

6fe4b6672f59dd45e0ada0538e5fb4b0_1422864

6fe4b6672f59dd45e0ada0538e5fb4b0_1422864

기르미의 하루 일과
“똑똑, 할머니 저희 왔어요.”
활짝 열린 문 앞엔 늘 찾아와 안부를 묻는 동장 홍동석 씨 그리고 뾰족한 귀를 쫑긋거리는 사회복지견 기르미가 서 있었다. “우리 기르미 왔어?” 라는 말에 보고 싶었다는 듯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기르미. 그 모습을 본 이판례 씨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폈다.
기르미는 2014년 7월 28일, 길음2동의 명예 공무원으로 임명된 사회복지견이다. 동장 및 사회복지사와 함께 주 3회 동네를 순찰하고 독거 어르신을 찾아뵈어 적적한 시간을 달래 주는 것이 기르미가 맡은 주된 임무다. 작년 2월 주인에게 버려져 길거리를 헤매던 강아지 기르미는 주민의 신고로 이곳 길음2동 주민센터로 오게 되었는데, 순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녀석으로 인해 주민센터의 분위기가 좋아지자 기르미에게 독거 노인의 외로움을 덜어 주는 일을 맡겨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 나온 것이다.

“기르미와 함께 아침 일찍 순찰을 돌아요. 우리 동네가 겉보기엔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골목골목 들어가 보면 혼자 사는 어르신이 많거든요. 신경 써서 찾아뵙지 않으면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죠.”

기르미의 주인인 길음2동의 동장 홍동석 씨는 사회복지견의 일과에 대해 설명했다. 여느 공무원과 똑같이 아침 9시에 출근하는 기르미의 하루는 직원들을 맞이하고 기르미와 놀고 싶어하는 주민들을 상대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주 3일 독거 어르신들을 찾아뵙는 날에는 하루에 약 여섯 집 정도를 돌아다닌다고 한다. 오늘 만난 이판례 씨는 기르미가 유난히 따르고 좋아하는 어르신 중 한 명이라고 했다.

6fe4b6672f59dd45e0ada0538e5fb4b0_1422864

6fe4b6672f59dd45e0ada0538e5fb4b0_1422864

노인과 반려견
“한 서너 달 됐지? 기르미와 만난 게. 저것이 쬐깐했을 때부터 이뻐해 놓으니까 날 잘 따르지. 원래 내가 또 개를 좋아해.”
기르미가 온다고 해서 일부러 외출도 안하고 기다렸다는 이판례 씨. 기르미를 바라보는 눈에선 사랑스러움이 뚝뚝 묻어났다. 마치 귀여운 손자를 바라보는 듯, 따뜻함이 담긴 눈빛이었다.

과거엔 폐지 및 고물을 주우며 생활을 근근히 이어나갔지만 날씨가 눈에 띄게 추워진 요즘은 그것도 힘들어졌다고 했다. 복지회관에서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 뒤 칼바람을 피해 집으로 돌아오는 나날은 지루하고 적막하다. 그런 와중에 기르미가 찾아와 재롱을 떠는 등 손자 노릇을 해 주니,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이젠 기르미가 없으면 많이 서운할 것 같다며 이판례 씨는 이야기했다.

“혼자서 벌어먹고 살랑께 춥고 외롭고, 저런 폐지라도 주우려면 피곤하고 힘들지. 그래도 이렇게 동에서 기르미와 함께 찾아와 주니까 살지. 혼자서는 못 살아. 동사무소로 일하러 갈 적엔 아, 여기 가면 기르미 보겠다~ 생각에 가고 그래. 재밌어.”
일하던 와중에 기르미를 만나면 반가운 마음에 입도 맞춘다며 소녀처럼 까르르 웃는 이판례 씨. 기르미가 잘 따르는 만큼 기르미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시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연이 있었다.

“내가 개를 이뻐한다고 했잖아. 젊었을 적 많이 키웠어. 기르미보다 더 큰 애도 키워 봤다니까. 그 개를 정말 좋아했는데, 어느 날 줄을 끊고 도망가 버렸어. 잃어버린 후로는 사흘동안 밥을 못 먹었어. 보고 싶어서. 그리고선 다신 안 키우려고 했지.”
충격으로 인해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그 개는 지금의 기르미를 똑 닮은 노란빛의 강아지였다고 했다. 그 때문일까,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는 이판례 씨와 기르미는, 길음2동의 그 누구보다 끈끈한 진짜 가족같다.

6fe4b6672f59dd45e0ada0538e5fb4b0_1422864

6fe4b6672f59dd45e0ada0538e5fb4b0_1422864

인생의 봄을 선물하다
할머니와 노는 기르미를 뒤로한 채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는 동장 홍동석 씨. 그는 길음2동이 무려 10여 년간 재개발 투쟁을 벌여오던 탓에, 그에 따른 어두운 분위기가 주민들을 감싸고 있었던 것 같았다고 했다. 오랜 시간 이어진 지리한 싸움은 주민들로 하여금 허물어진 집의 수리조차 망설이게 했고, 점점 늘어가는 빈 집엔 적막함만이 맴돌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길음2동엔 우울함을 호소하는 독거 노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홍동석 씨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길음2동이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을 낫게 해줄 힌트가 바로 기르미에게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기르미와 함께 어르신을 찾아뵙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르미가 온다고 하면 다들 맞이하는 안색부터 달라지셨으니까요. 건강이 좋아지신 건 물론이고요.”
최근엔 우울감을 호소하는 노인 및 주민을 대상으로 한 ‘웃음치료교실’에 기르미를 보조 강사로 투입시켰는데, 지시를 잘 따르는 기르미덕에 학생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단다. 기르미가 오고 나서 동네 분위기도 많이 좋아졌다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홍동석 씨. 아직은 ‘앉아’밖에 못하는 기르미지만, 충분히 훈련시켜서 독거 노인분들의 합동 생일날 선물전달식을 맡겨보려 한다며 어르신을 생각하는 마음을 조심스레 내보였다.

흔히들 시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한다. 세월은 힘이 세서 소녀를 할머니로 그리고 사이좋던 가족을 남남으로 변모시키기도 하지만, 그러한 시간의 흐름에도 굴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반려견이 전하는 사랑이 아닐까. 외로운 나를 기억해 주고 곁에 있어 주는 존재. 내가 잃어버린 추억과 웃음을 찾아주는 유일한 가족 말이다. 아직은 매서운 겨울이 머물고 있는 길음2동이지만, 기르미를 배웅하는 이판례 씨의 양 볼엔 어느새 분홍빛 봄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Tag #펫찌
저작권자 ⓒ 펫찌(Petzz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0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