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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는 진짜 친구가 있나요?

  • 승인 2014-11-25 15: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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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는 진짜 친구가 있나요?
영화 <벨과 세바스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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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친구란 무엇일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단번에 알아맞히는 친구, 진심으로 나를 신뢰하고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함께하는 친구, 언제 어디서든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단짝 친구……. 여기까지 생각해 보니 진정한 친구를 표현하는 수식어는 반려인과 반려견 사이를 수식하는 문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고 마음을 다하는 반려인과 반려견은 분명 진짜 친구다.

이대훈 일러스트레이션 조가영

인생의 척도, 친구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자신에게 ‘친구’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이가 다섯 명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들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걸까? 다섯 명이나 되어야 잘 산 인생이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당신의 인생에서 진정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당신은 꽤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친구를 만나기란 어쩜 이리도 어려운 것인지. 친구가 될 수 있는 이를 찾아 만나기에 인생에서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다. 집을 나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여덟 살부터, 우정이란 단어보다는 스펙이라는 단어에 더 집중하게 되고 그로써 사회로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 20대 후반의 나이까지는 약 20년이라는 시간이 고작이다.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짧은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시작이 중요하다. 만약 남들과 동일한 선상에서 시작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 영화 <벨과 세바스찬> 속의 세바스찬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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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이 혼자인 소년 세바스찬
프랑스의 북서부, 알프스 산과 마주보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는 세바스찬은 친구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주위에 한 명도 없는 소년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는 그를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고 산골 마을에는 온통 어른들밖에 없어 세바스찬은 늘 혼자였다. 외로운 소년이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일이란 나이든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양떼를 몰거나 마을의 개울에서 혼자 물수제비를 뜨는 일뿐이다.


산과 들에서 유유자적 즐기는 것처럼만 보이는 세바스찬이 안쓰러운 이유는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나눌 공감의 대상, 다시 말해 친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라도 있어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보듬어 주면 좋으련만 소년의 말에 따르면 엄마는 ‘알프스 너머 미국’에 있단다.

나와 친구가 되어 줄래요?
아무래도 하늘은 혼자 있는 세바스찬이 너무나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에게 벨이라는 친구를 보내준 걸 보면. 그날도 소년은 할아버지와 함께 산기슭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좀 다른 분위기다. 할아버지의 어깨에는 손때 묻은 사냥총이 걸쳐져 있고 세바스찬의 어깨에도 총 모양을 본따 나무로 만든 총 모양의 막대기가 보인다. 그런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할아버지와 헤어져 혼자 걷던 소년 앞에 어느 순간 덩치 큰 누더기 개가 나타났다. 양을 물어 죽였다고 할아버지가 ‘짐승’이라고 부르는 개, 그래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없애 버리려 찾아다니던 개. 바로 그 녀석이다.


‘짐승’과 맞닥뜨린 소년은 두려워하는 게 당연한 일이련만 이상하게도 세바스찬은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꼬질꼬질하게 때가 탄 털 때문일까 아니면 기운 없는 눈망울 때문일까. 아마도 마음을 나눌 대상이 없는 소년을 둘러싸고 있던 외로움이라는 공기가 혼자서 쫓겨 다니는 녀석의 외로움과 공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둘은 가만히 눈을 맞추며 서로의 마음속 외로움을 느낀다.


첫 만남의 순간은 마을 아저씨들의 등장으로 금방 끝나 버리고 말았지만 세바스찬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개를 찾아 나선다.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녀석과 만나려고 했던 건 아니다. 그저 할아버지가 설치한 덫에 걸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양을 물어 죽였다는 건 분명히 괜한 누명이었을 거라는 확신 때문에. 따지고 보면 자신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개인데도 세바스찬은 녀석을 걱정하며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렇게 다가간 덕분일까. 다시 만난 둘은 친구가 되어가는 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디디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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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이름으로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이들 중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와 친구가 될까? 이득을 가져다주는 존재와 친구가 되는 걸까? 화려하고 예쁜 외모의 존재와 친구가 되는 걸까? 그런 존재와 친구가 돼야 하는 걸까? 만약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친구를 만들려 한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어두웠을 것이다.


마음을 나누는 기준이 겉모습이 아니듯이 세바스찬이 개를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남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숨겨진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하는 것, 친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닐까?


세바스찬과 함께 개울에서 목욕을 하고 털에 묻은 꼬질꼬질한 때가 씻겨나간 개는 감춰뒀던 보석이라도 꺼내놓듯 눈부시게 새하얀 털로 환골탈태한다. 소년은 그에게 할아버지가 불렀던 ‘짐승’이라는 이름 대신 ‘벨(belle : 아름다운)’이라는 이름을 기꺼이 붙여 준다. 자신을 투명한 마음으로 바라봐 주는 존재 덕분에 벨은 비로소 자신의 본모습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다.


그렇게 벨만 달라진 거라면 섭섭한 일이겠지. 세바스찬은 아이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나간다. 벨이 곁에 있기에 용감하게 앞장서서 피난민들을 인솔하고, 슬픔도 감내한다. 성숙해진 소년은 알프스 너머에 있는 것은 미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을 때도, 할아버지에게 엄마에 대한 진실을 듣던 순간에도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벨은 세바스찬 덕분에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펼칠 수 있었고 세바스찬은 벨 덕분에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서로를 진심 어린 마음으로 대함으로써 친구가 된 덕분이다.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그만큼 진심을 다할 친구를 찾기 위해서. 인생의 한 부분, 짧은 시간 동안 진정한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 죽음 앞에서 뒤돌아봤을 때 참된 인생을 살았다고 만족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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