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 사는 고양이
우리는 스위스의 이방인 가족
지독한 향수병에 걸린 나는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끊어 한국에 갔었다. 한 달 반가량 한국 체류 후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스위스에 돌아왔을 때, 남편은 본인의 오랜 소원이었던 아기고양이 입양을 제안했다. 향수 병과 외로움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내가 어린 생명을 평생 책임질 수 있 을까? 남편은 망설이는 내게 우선 고양이를 직접 보러 가자고 제안했 다. 입양을 기다리는 고양이는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였다.
스위스에 사는 이방인
외국에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외롭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만 삼십 년을 살았던 내가 아무런 연고 없는 스위스에 서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간 첫 해외살이의 희로애락을 야 무지게 겪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사는 데 가장 기본적인 문제 인 언어였다. 스위스의 공식 언어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 아어, 로망슈어로 총 네 개나 된다지만, 이중 내가 할 줄 아는 언어는 없었다.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나는 왜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주어에 따 라 동사가 변하는 프랑스어는 영어에 비하면 어쩜 이리 복잡하 고 외울 것도 많은지. 한국에서는 하고 싶은 말 실컷 하며 살다 가, 본의 아니게 꿀 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곳은 한국인은커녕 길거리에서 아시아
인 한 명 보기 힘든 곳이다. 그래서일까, 밖에 나갈 때면 쏟아 지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다. 보수적인 스위스의 국가 특성상 외국인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다. 같은 유럽 국 가 사람들이야 외모가 비슷하니 겉으로는 외국인인 게 티가 잘 나지 않지만, 나는 외모부터 완벽한 외국인이다 보니 때로는 상당히 불쾌한 시선을 느낄 때가 많다. 한국에서 나는 어엿한 대학 졸업장이 있었고, 열심히 직장생활 도 했었다. 부모님과 형제들, 친구들처럼 나라는 존재를 인정 해주는 좋은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지만, 여기에서 나는 오롯 이 혼자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른 곳에서 남편이 일 하러 나간 시간이면 집에 홀로 남아 외로움에 시달리곤 했다. 이렇듯 나의 첫해는 상당히 외로웠다.
마음 나눌 인연을 만나다
지독한 향수병에 걸린 나는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끊어 한국에 갔었다. 한 달 반가량 한국 체류 후 무거운 마음으 로 다시 스위스에 돌아왔을 때, 남편은 본인의 오랜 소원 이었던 아기고양이 입양을 제안했다. 향수병과 외로움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내가 어린 생명을 평생 책임질 수 있 을까? 남편은 망설이는 내게 우선 고양이를 직접 보러 가 자고 제안했다. 입양을 기다리는 고양이는 한 마리가 아 니라 두 마리였다. 한 마리는 검은 털에 흰털이 조금 섞인 일명 ‘턱시도냥’이었고, 다른 한 마리는 노란 털과 흰털의 ‘치즈냥’이었다. ‘치즈냥’에 대한 사람들의 입양 문의는 많지만, ‘턱시도냥’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다는 얘기를 들
었을 때 괜히 마음이 시렸다. 스위스에서 이방인으로 붕 뜬 나와 남편처럼 애처롭게 느껴졌다. 우리는 두 마리를 함께 입양하여 노아와 폼폼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유러피안 숏헤어인 노아와 폼폼은 한 국인인 나와 프랑스인 남편으로 구성된 우리 가족에게 처 음으로 생긴 스위스와의 연결고리였다. 남편도 나도 스위 스에서는 외국인이기에 보수적인 이곳에서 마음을 나눌 인연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우리에게 와준 것이 바 로 스위스 고양이 노아와 폼폼인 것이다. 남편과 나는 노 아와 폼폼을 함께 보살피면서 여기에 점점 정착하고 있다 는 안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존재
가끔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산다는 것이 몸 서리치게 지치고 괴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바로 인종차별을 겪을 때다. 인종차별, 나 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그 느낌은 겪어 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느 날 길 을 걷고 있는 내 뒤에서 “칭챙총”거리며 나 를 조롱하는 철없는 십대들을 만난 적이 있 다. 단지 내 인종이 아시안이라는 이유만으 로 나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인종차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훅 치 고 들어온다. 그리고 나의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곤 한다. 왜 여기에서 난데없는 인종차 별을 당해야 하나, 가라앉은 마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나를 반겨준 이들이 있었다. 안방에서 곤히 낮잠을 자다가 내 발소리만 듣고 나라는 걸 안 노아와 폼폼이, 졸린 눈
을 꿈뻑꿈뻑하며 마중 나온 것이다. 낮잠을 더 자고 싶었을 텐데, 침대에서 나와 반갑 게 부벼대는 노아와 폼폼을 보고 나는 울컥 했다.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나를, 인종이나 그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고 무조 건 사랑해주는 나의 유일한 스위스 가족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그 날은 한참을 노아와 폼폼을 쓰다듬으며 잔잔한 위로를 받았다. 나의 인종이 다른 것은 노아와 폼폼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 는 것이었다. 그저 내가 아이들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처럼, 노아와 폼폼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고 따르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스위스에서 만난 가족이니 까. 가족은 조건 없이 서로를 사랑해 주는 존재니까.
CREDIT
글·사진 이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