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틀 리 에 의 고 양 이
삶에 온기를 불어넣는
고양이를 그리다
화가 김규희
화가 김규희의 작업실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산다. 보통 작업실에 고양이가 있다면 작가와 함께 출근한 집고양이이거나 동네 식객 고양이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가 고양이와 함께하는 사연은 좀 특별하다. 처음부터 고양이를 데려오기 위한 독립공간으로 작업실을 구한 탓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고양이를 사랑하는 화가에겐 “고양이와 자기만의 방”이 절실했다.
김규희에겐 고양이와 함께하는 삶이 공기처럼 자연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는 늘 동물들이 있었고, 그런 고양이들을 활달한 필치로 그려내는 아버지를 보며 자연스레 애묘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결혼 후 남편의 반대로 고양이를 키울 수 없는 세월이 길어지자, 고민 끝에 고양이와 함께 지낼 작업실을 구했다. 입지를 검토할 때도 ‘창밖을 내려다볼 수 있고 동물병원이 가까운 공간’을 1순위로 정할 만큼 고양이 위주로 얻은 작업실이었다.
그러나 입양은 쉽지 않았다. 2015년 초 작업실부터 열고 입양신청서를 여러 통 써서 보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때부터 작전을 바꾸었다. 집이 아닌 작업실이니, 고양이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보러 오실 수 있게 하겠다고. 그 진심에 마음을 열어준 분이 첫째 멀로의 전 반려인이었다. 그분은 고양이 이름을 ‘뭘로’ 할까 고민하다 ‘멀로’라고 지어주었단다.
임보냥이 멀로와 길고양이 모냐를 가족으로 맞이하다
임보로 처음 인연을 맺었던 페르시안 친칠라 멀로는 처음부터 낯가림이 없었다. 이동장에서 나오자마자 작업실을 구석구석 탐색했다. ‘음, 여기가 앞으로 살 곳인가?’ 생각하는 듯했다. 컴퓨터를 쓸 때면 키보드 옆에서, 그림을 그릴 때면 화구 곁에 앉아 계속 쳐다보곤 했다. 전 반려인도 멀로가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입양에 동의해줬다.
작업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있지만, 퇴근하면 혼자 남을 멀로가 눈에 밟혀 데려온 동생이 모냐다. 어린 시절부터 늘 함께였던 삼색고양이 복길이를 떠올리며, 꼭 삼색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멀로의 이름이 그랬듯, ‘뭐냐’를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한 것이 둘째의 이름이 되었다.
생후 2개월 때 처음 온 모냐는 멀로가 친오빠인 양 졸졸 따라다녔다. 처음엔 하악거리던 멀로도 금세 마음을 열었다. 닷새째 되던 날 출근하며 보니, 모냐가 멀로의 배에 기대어 편안히 누워 있는 게 아닌가. 둘의 입양 이야기를 담은 수묵화 개인전 <묘념묘상>을 준비하다가, 그림책 <가족이 된 고양이 모냐와 멀로>를 출간하기도 했다.
저녁이 되어 퇴근하면 둘만 있을 게 걱정되어 웹캠을 설치하고 집에서도 때때로 지켜본다. 처음엔 목소리라도 들려주고 싶어 스피커에 대고 부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둘이 당황하며 그를 찾는 모습이 마음 쓰여, 요즘은 부르지는 않고 눈과 마음에 담기만 한다. 보고 있어도 그립고, 못 보면 더 생각나는 고양이들을 수시로 그리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림’이란 말의 어원이 그리움에서 나온 거라더군요. 전 항상 고양이가 그리워요. 지나간 고양이, 함께하는 고양이…. 너무 아름답고, 그리워서 저도 모르게 자꾸 그리게 되는 것 같아요.”
해외 고양이 명소에서 마주친 공존의 풍경
고양이로 소문난 해외 여행지를 짬짬이 찾아다니기도 했다. 육손 고양이(발가락이 6개인 다지증 고양이)들이 살고 있는 미국 플로리다 주의 헤밍웨이 하우스, 애묘의 나라로 유명한 터키, 일본의 고양이 섬 아이노시마 등지에서 만난 고양이들의 기억은 고스란히 풍경화로 남았다.
헤밍웨이 하우스에선 고양이들이 너무나 평온하고 아름다워 보여 육손인 줄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이노시마에선 둘째 아들과 함께 자전거를 빌려 타고 애교 많은 길고양이를 만나러 다녔다. 어렸을 때 고양이를 무서워하던 둘째 아들은, 엄마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세상 모든 고양이가 좋아졌노라고 털어놓았다. 특히 길고양이와 사람들의 따뜻한 공존을 볼 수 있었던 터키는 그에게 잊지 못할 나라다.
“오래전에 동생이 인터넷으로 전생 테스트를 해봤대요. ‘언니는 전생에 터키의 길고양이였대’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늘 터키 길고양이가 제 맘속에 있었죠.”
그는 “모두에게 배타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삶을 터키에서 보았다”고 했다. 관광지 매표소, 심지어 가로등 밑에도 정갈하게 준비된 사료와 물이 있었다. 터키인이 한국인에게 ‘형제’라는 호칭을 즐겨 쓰는데, 동물에게도 그런 마음으로 대하는가 싶었단다. 터키에서 만난 고양이들은 그냥 산책자 같았다. 사람을 꺼리지도 피하지도 않고, 제 갈 길을 가거나 앉아서 쉬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고바우 영감’과 고양이 작가, 부녀의 2인전
그리움과 애틋함, 반가움을 담은 김규희의 고양이 그림은 수묵화와 수채화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밑그림 없이 낙서하듯 자유롭게 그리고 싶을 때, 빠른 시간에 그릴 수 있어서 좋단다. 가끔은 고양이의 털을 촉감으로도 느낄 수 있도록 보드라운 퍼 질감의 천을 캔버스에 콜라주하기도 한다. 2018년 5월 광화랑에서 열린 <김성환?김규희 2인전-고바우 작가와 고양이 작가의 고양이 작품전>에서 선보인 고흐의 그림이 그것이다. ‘우울증에 시달렸던 고흐에게 고양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상상을 그림으로 풀어냈는데, 언젠가 헤밍웨이나 프레디 머큐리 등 명사들이 사랑한 고양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보고 싶다. 고양이 입장에서 반려인을 바라본 시점으로 묘사하게 될 거라고 한다.
특히 작년에 열린 2인전은 시사만평 <고바우 영감> 작가로 유명한 아버지와 처음 함께한 전시라 더욱 뜻깊다. 원래 <애묘유전(愛猫遺傳)>이란 전시명을 쓰려 했을 만큼, 부녀간에 이어져온 고양이 사랑을 담뿍 담은 전시다.
“아버지가 고양이를 워낙 좋아하셔서, 어슬렁거리는 녀석들을 발견하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꽁냥꽁냥하며 말을 거시던 모습이 기억나요. 전시에 소개한 그림들은 전부 저희 집에서 키웠던 아이들이죠. 주로 널브러져 자는 고양이들을 수묵으로 그리셨어요. 50년간 <고바우 영감>을 연재하셨지만 회화 작업도 꾸준히 하셨는데, 11번의 개인전 모두 회화 작업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마감 스트레스를 회화 작업으로 푸셨던 게 아닌가 싶어요.”
때론 묵직한 풍경화로, 때로는 낙서처럼 가벼운 그림으로, 가끔 종이컵이나 빈 과자 상자, 오래된 인형 등을 재활용해 만든 수공예품으로 고양이를 그리거나 만드는 김규희 작가. 그는 잔잔한 위로와 만족을 주는 그림책이나, 고양이 그림과 글이 어우러진 수필집을 써보고 싶다고 전했다. 기회가 된다면 평소 좋아했던 기업과 컬래버레이션을 한 작품도 만들어보고 싶다.
“사건 사고 많은 이 세상에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하는 잔잔한 그림을 널리 퍼트리고 싶어요. 고양이의 고롱고롱 소리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아는 사람만 아는 조용한 울림으로, 온기를 나눠주는 위로 같은 그림을요.”
CREDIT
글·사진 고경원
자료협조 김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