냥 이 는 외 출 중
프로 외출냥이 : 뽀리 이야기
외출냥이의 봄날은
고양이들의 사회
처음 뽀리를 데려간 집에서 8년을 살았다. 뽀리를 구조한 곳은 대학 캠퍼스였고, 캠퍼스는 산 중턱에 위치한 곳이라 뽀리의 안식처는 산이었다. 8년을 산 곳 역시 북한산 자락 끄트머리의 언덕이었다. 이사를 가게 된 건 재개발 때문이었다. 오래된 동네였 고, 그래서 길고양이도 많았다. 뽀리 때문에 문을 열어놓고 지내곤 했는데, 동네 고양이들이 집에 들어와 기웃거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오래된 동네여서인지 다들 문을 열어놓고 지냈다. 우리 빌라 현관문도 항상 열려 있었다. 옥상 문도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동네 고양이들의 놀이터가 되곤 했다. 사람이 살기에는 다소 위험했지만 고양이가 살기에는 좋은 곳이었다.
그 동네에는 고양이들의 사회가 확립되어 있었던 것 같다. 새로 태어난 새끼들이 자라 새로운 강자가 되기도 하고, 또 기존의 강자가 왕위(?)를 재탈환하기도 하는 스펙터클한 사회 말이다. 뽀리 같이 인간계에 한 발 걸친 쫄보 고양이가 이런 사회에 잘 녹아들 리 없다. 거친 고양이들의 세계에 갓 입문할 시기에 구조된 탓에 뽀리는 그 세계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은 뽀리가 고양이 세계의 구성원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인간이 결코 채워줄 수 없는 고양이들만의 감정적 교류가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무지했다.
쌈닭 고양이, 뽀리
바깥 고양이들에게는 고유의 영역이 정해져 있었고, 어느 영역이 누구의 것인지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뽀리는 아무 것도 몰랐다. 녀석은 눈치 없이 길고양이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오가는 와중에 웬 집고양이가 뜬금없이 나타나 으르렁대니 고양이들로선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뽀리의 으르렁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나가 상황을 종료시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밤 시간 이웃들에게 민폐이기도 했고, 변변치 못한 중성냥이 뽀리가 짱 쎈 수컷 냥이와 대적할까 걱정도 되었다. 우리가 고양이 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뽀리는 많이 맞고 다녔다. 어디서 맞고 들어와서 피를 찔찔 흘리는 뽀리를 볼 때마다 중성화수술을 안 했으면 좀 더 늠름한 고양 이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춘기 아이를 둔 부모의 심정이랄까. 비행청소년이 된 아들내미를 지켜보는 느낌이었 다. 뽀리가 싸움을 걸면 암컷냥이들은 도망을 갔고, 또래 수컷냥 이나 한두 살 먹은 젊은 고양이들이 결투에 응했다. 막상 싸움이 시작되면 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싸우는 도중에 나를 보면 녀석은 지원군을 얻은 양 의기양양해져서는 더 크게 울고 사납게 공격했다. 이런 태도는 싸움을 못하는 뽀리가 더 많이 맞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걸 알고부터 나는 웬만해선 나가보지 않았다. 부상을 입는 날이 허다했지만, 이미 시작된 외출냥이의 습성은 돌이킬 수 없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뽀리가 으르렁대면 맞받아쳐 으르렁해야 싸움이 되는 거였다. 언젠가 뽀리의 으르렁 소리를 듣고 나가보니 저 위 담벼락에서 근엄하게 뽀리를 내려다보며 식빵을 굽는 턱시도냥이가 있었다. 그는 뽀리를 넌지시 보고만 있었다. 흡사 보스냥이 같은 포스가 풍겼다. 하지만 뽀리는 턱시 도냥이에게 덤비기를 멈추지 않았다. 치즈태비나 고등어도 덤볐 는데, 뽀리의 속내는 저마다 달랐다. 동족인 고등어에게는 질투가 나서 괴롭혔고, 태비에게는 라이벌 의식을 느꼈으며, 턱시도를 보면 열등감이 폭발했다. 어떻게 아느냐고? 나는 저 쫄보 고양이와 10년째 동거하는 사이다.
그동안 뽀리가 외출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옥상에서 놀기 위해. 재개발이 예정된 집의 옥상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유년을 보냈기 때문인지 녀석은 옥상의 시멘트 바닥 같은 곳을 보면 뒹굴며 애교를 피웠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다. 바깥 고양이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뽀리는 빌라 건물의 계단과 옥상을 자신이 영역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계단에서 마주친 고양이와는 유독 피 튀기는 전쟁을 했다.
너무 싸우는 통에 녀석의 외출을 막아보려 한 적도 있다. 하지만한 번도 안 나간 집고양이는 있어도 한 번 나간 집고양이는 없다 고, 야생을 맛본 고양이를 집안에 가두는 건 불가능했다. 싸움꾼 답지 않게 뽀리는 소심하고 맷집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집안에 있어도 스트레스, 집 밖에 나가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옥상이 녀석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뽀리는 집인 듯도 아닌 듯도 한, 옥상이 라는 공간을 좋아했다.
외출냥이의 봄날
그 오래된 동네에는 시골에서처럼 개를 그냥 풀어놓고 길렀다. 신기하게도 개들은 사람이 다니는 길로 다녔고, 고양이에게는 고양이만의 길이 있었다. 고양이들은 담과 담을 넘고 지붕 위를 활보했다. 개와 고양이는 서로 부딪칠 일이 없어 평화로웠다.
개들은 서로 싸우지 않았고, 고양이들은, 청년 고양이가 세력을 키우려 전쟁을 일으키는 게 아닌 이상 평화로웠다. 악의 축은 뽀리였다.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 탓인지(세상을 왕따시키는 자기 만의 세계가 있다!) , 사회화되기 전부터 사람과 지내서인지, 뽀리는 야생의 묘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뽀리에게도 봄날이 왔다. 중성화된 반쪽짜리 수컷냥이에 게도 마음에 드는 암컷냥이가 나타난 것이다! 사실 그간 친구가 키우던 고양이를 데리고 있었던 적도 있고, 옥상에 놀러 온 암컷 고양이와 우연히 마주친 적도 있지만 뽀리는 심드렁했다. 중성화수술 때문에 암컷을 좋아하지 못하는구 나, 싶었는데, 어느 봄날, 뽀리가 창가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밖에 나가 한참을 안 들어올 때도 있었지 만, 녀석은 구석진 곳에 숨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도 어디 엔가 숨어있겠지 했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여느때처럼 나는 문득 큰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창으로는 아랫집 지붕을 볼 수 있었다. 지붕은 동네의 고양이들이 햇볕을 쬐며 잠을 자는 곳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뽀리가 있었다! 게다가 녀석이 어느 고양이에게 다가가고 있다. 고양이는 뽀리를 경계하 지 않았다. 뽀리가 쭈뼛거렸다. 평소의 경계용 포복 자세가 아니었다. 뽀리는 고양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한동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날 이후 뽀리는 몹시 자주 창밖을 보며 지붕 위를 확인했다. 외출하는 횟수가 늘었다. 며칠 후 창밖을 보니 뽀리는 그 고양이 옆에 앉아 식빵을 굽고 있었다. 뽀리처럼 사회성 없는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 곁에서 편안하게 식빵을 굽다니. 나는 아직도 그 감격적인 장면을 기억한다.
이후의 일은 알 수 없다. 아마도 봄날이 길지는 않았다고 짐작할 뿐이다. 아무래도 상대 고양이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던 것같다. 외출은 잦았지만 지붕 위의 투 샷은 그날이 마지막이었으 니까. 아, 중성화수술 탓에 남자다운 매력을 보여주지 못한 걸까. 미안하다 뽀리야.
하지만 그렇게 길고양이와의 거리를 좁히는 걸 보니 희망이 생겼다. 외출냥이로 살 수밖에 없게 됐는데 나갈 때마다 싸우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묘생 10년 차에 접어드는 요즘 뽀리는 매일 외출을 하면서도 전처럼 고양이들과 싸우지 않는다. 봄날의 지붕 위 고양이 덕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전장에 나가는 전투냥이의 마음이 아닌, 나들이 그 자체를 즐기게 된 외출냥이로의 첫발은 그때 뗀 게 아니었을까. 그날 뽀리는 다른 세계의고양이들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CREDIT
글 사진 등사자
에디터 이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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