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양이는 10살
너와 함께 한 시간은 9년
작년 겨울, 아홉 살을 넘긴 내 고양이 희동은 신부전 초기 진단을 받았다. 희동의 나이가 곧 두 자릿수가 되고, 수의사들이 말하는 ‘공식적인 노묘’가 된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불안하던 때였다. 그때부터 우리는 매일 시간대별 케어 일지를 기록하며, 아홉 달째 희동이를 지켜봐 왔다. 희동이 하루에 물을 얼마나 먹었는지, 보조제는 다 챙겨 먹었는지, 배변 상태에 이상은 없는지 기록하는 노트다.
고백하자면 나는 희동이 아프다는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절망했고, 많은 시간을 분노하고 슬퍼하는 데 썼다. 정작 희동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로 잘 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을 보는 내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썩였다. 예전 같으면 순도 101%의 넘치는 사랑으로 바라봤을 내 고양이의 귀여운 뒤통수가, 이제는 쓸데없이 애틋해서 틈만 나면 삐죽삐죽 눈물이 났다. 그러다 문득 마음 한구석에 희미하게 자명종이 울리듯이, 어떤 생각들이 떠올랐다. 내가 희동의 나이듦과 질병,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이별에 대해 미리 극성을 떨며 슬퍼하느라 귀한 시간을 공중에 흩뿌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내 불안감이 어쩌면 희동이의 평온한 노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거다.
지금껏 습관처럼 ‘고양이를 키운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희동이 내게 의지하던 순간보다는 그냥 일상적인 행복을 함께 누릴 때가 많았다. 그래서 더 가볍게 내 고양이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떠들며, 주변 사람들에게 고양이와 함께 살라고 권하곤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덮어 놓고 사랑한 것일 뿐 ‘키운 것’은 아니었구나 싶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의 노년기는 내가 희동을 조금 더 정확하게 사랑할 수 있는, 보듬으며 ‘키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일 거다.?
희동은 어릴 때부터 점잖고 차분한 성격의 고양이였다. 컵을 깬다든지, 물건을 망가뜨린다든지, 자잘하게 사고를 치는 일이 거의 없어서 한 번씩 ‘너도 말썽 좀 부려 봐’라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의사 표현은 아주 확실해서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곤 했다. 캣닢을 꺼내 놀고 싶을 때, 원하는 간식이 있을 때, 같은 장난감이라도 놀이 방법을 달리 해줬으면 싶을 때 희동은 항상 원하는 바를 내게 전달했다. 그 섬세한 호불호가, 나만 이해할 수 있는 표현 방식들이 희동이를 ‘내 고양이’로 만들었다.?
물론 오랜 시간을 함께 살며 서로에게 익숙해진 것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안다. 희동이 아프다는 걸 알고 몇 번이나 마음이 무너지면서도 소리 내어 울지 못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견고하던 행복이 흔들리는 순간에 마음껏 괴로워하지 않는 것, 그런 게 나잇값이라고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사실 희동이 (우는 날 보고) 놀라 불안해하는 것 말고 신경 쓰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면에선 가족이나 배우자보다 더 깊은 교감을 나누는 희동이 내 슬픔을 모를 리 없으니까, 희동이를 위해서라도 내 마음이 평온하고 믿음직스러워야 한다고 다짐하며 시간이 흘렀다.
반려동물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의 밀도가 달라진다고들 한다. 지금껏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해 생각하고, 앞으로 같이 나눌 생에 대해 떠올려 보기 때문일 거다. 언젠가 한번은 일상처럼 남편에게 불안감을 털어놓으며 (희동이 없는 집 밖에서) 눈물을 훔치다, ‘희동이 어릴 때 더 많이 사랑해줬어야 하는 데 후회스럽다’ 고백한 적이 있다. 그때 남편이 나에게 ‘그때도 너는 희동이한테 끔찍했어’라고 했던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으며 잔잔하게 위로가 되었다.
지금 내 고양이가 나이 들어간다고 해서, 하나둘 아픈 곳이 생긴다고 해서 여태 함께 한 시간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니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었달까. 돌이켜 보면 그냥 사랑할 수밖에, 앞을 찬찬히 내다봐도 지금보다 더 사랑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언젠가 나 몰래 빵을 훔쳐 먹던 희동이와 그 덕에 더없이 즐거웠던 오후, 좋았던 햇살까지 빈틈없이 마음에 담으며 더 열심히 사랑할 수밖에.
‘라몽 의사 아저씨는 내 우산 아르튀르를 찾으러 내가 있던 곳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필요로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야 한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그러니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더 사랑해야 한다.
CREDIT
글 사진 박초롱
에디터 이제원
콘텐츠의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