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리에의 고양이
긴꼬 어르신과 함께 쓰는 고양이 일기
일러스트레이터 이진아
아이의 그림일기가 사랑스러운 건 자유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기장에 무엇을 써야 할지보다, 무엇을 안 써야 하는지 깨달으면서 아이는 어른이 된다. SNS는 그렇게 자기검열을 거친 어른들의 일기로 넘쳐난다. 모두가 “행복해요”라고 외치는 그곳에서, 이진아의 시니컬한 그림일기는 홀로 돋보인다. 붓펜으로 속도감 있게 그린 그림은 표창처럼 날아와 마음을 찌르고, 정치판을 향해 던지는 욕설은 뇌리에 찰싹 달라붙는다. 특히 16살 고양이 긴꼬가 등장하는 일기는 거칠면서도 귀엽고, 애틋하면서도 웃겨서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된다.
작업 책상 뒤편 책꽂이에는 참고자료와 그간 그린 작업물, 직접 만든 동물 모형이 빼곡하다.
주로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림엽서들.
긴꼬는 이진아의 첫 고양이다. 2002년 4월 어느 카페에서 새끼 길고양이를 입양 보낸다고 해서 데려온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긴 꼬리 고양이라 이름도 긴꼬로 지었다. 약간 모자란 아들 같던 둘째 고양이 망고, 긴꼬가 낳은 새끼인 셋째 응달이도 있었지만, 2009년에 둘 다 몇 달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긴꼬만 남았다.
그렇게 단둘이 살아온 세월이 벌써 10년. 이진아는 긴꼬를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의젓한 고양이를 본적이 없어요. 표정 보면 제 마음을 다 아는 것 같고, 제가 아프면 핥아주러 와요. 상태가 안 좋으면 ‘괜찮냐?’ 하는 표정을 짓고요. 가끔 엄마 같고 어떤 때는 가족보다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정신적으로 나를 지지해주고 심미적으로도 만족시켜 주는 존재잖아요. 인간의 관계와는 확실히 달라요. 저한테는 긴꼬는 절대적인 관계입니다.”
이진아는 “긴꼬가 나를 성장시켰다”고 털어놓는다. 어렸을 땐 생명에 대한 감수성과 공감 능력이 낮고 폐쇄적이었다. 그때 그리던 그림들도 거칠고 폭력적이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긴꼬를 키우면서 자신이 사는 세계와, 동물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그는 원래 만화를 즐겨 그렸다. 낙서처럼 그림을 그리던 시절, <10만원 영화제> 스태프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그에게 포스터를 맡겼다. 대중이 볼 그림이라 생각하니 잘하고 싶은 승부욕이 돋았다. 2001년 <인디다큐페스티발> 디자이너로 섭외됐을 때는 이미지 소스가 필요하다고 해서 직접 일러스트를 그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어 있었다. 특히 2005년부터 일러스트로 참여한 <인디애니페스트>는 지금까지도 매년 포스터 작업을 할 정도로 애착을 품는 행사다. 고양이를 좋아하니 동물과 관련 없는 작업에도 슬쩍 고양이를 등장 시킨다. 특히 영화제 굿즈에 고양이가 들어가면 거의 완판된다고 한다."
이젠 사람보다 거의 동물을 그리는데 볼수록 신비롭고 경외심이 들어요. 특히 긴꼬에게 야생스러운 느낌이 들 때 짜릿해요.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자유와 독립이에요.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으면서 싫은 소리 안 하고, 싫은 소리 안 듣고 제멋대로 사는 게 꿈이었거든요.
고양이가 그런 맛이 있어요. ‘네가 감히 나를 길들이려 해?’ 하면서 발톱 내밀 때, 절대 지배되지 않는 그 모습이 좋아요. 어르신은 저한테는 꽤 제멋대로 구는데, 그것도 마음을 열어서 그런 거라 생각하니 기쁘더라고요. 그래서 긴꼬가 제 손을 물려고 하면 조용히 내어드립니다.”
지금은 일러스트 작업을 주로 하지만, 자신이 매료된 고양이 그림을 담은 굿즈도 여러 가지 만들어보고 싶다. 컵이나 그릇처럼 대량생산해서 누구나 저렴하게 사기 편한 제품이면 좋겠단다. 특히 일본식 가리개 천의 일종인 노렌에 고양이 그림을 담아 만들어보고 싶다. 그의 집에는 방 문을 모두 뜯어내고 노렌을 걸어두었다. 긴꼬가 언제든 편하게 다닐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는 집 한 켠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동물 다큐멘터리 자료집, 일본 우키요에 화집, 직접 만든 동물 인형으로 가득한 책꽂이에서 그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다. 출판용 그림은 대개 가는 선으로 꼼꼼하게 그리지만, 그림일기는 밑그림 없이 붓펜으로 휙휙 그려낸다. 그렇게 그린 일기는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제가 진짜 소심해서 비싼 종이에 그리면 발발 떨었어요.
근데 갱지에 붓펜으로 마음 가는 대로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겁이 많이 없어졌어요. 붓펜으로 그리면 속도감이 맛을 내서 뭔가 쾌감이 있습니다. 예전에 그린 그림을 보면 제가 진짜 쪼그라들어 있거든요. 지금은 뭔가 넓어진 기분입니다.”
예전에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것만 잘할 수 있으면 수명이 줄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끙끙대고 작업했다. “그랬더니 진짜 수명도 줄은 것 같고, 사람들도 몰라주고, 나도 모르겠더라고요.” 오히려 그런 부담을 내려놓고 그린 그림이 더 잘 나올 때가 많았다. 그래서 요즘 목표는 “웬만하면 최선을 다하지 말자”다. “이제는 막 잘하려고 몸부림치진 않으려고 합니다.' 잘할 수 있는 걸 하자. 최대한 자연스럽고 즐겁게.’ 그렇게 마음을 그렇게 먹어서인지 몰라도 일도 재미있고, 그림 그리는 일도 즐거워지고, 뭔가 잘 안 돼서 틀어져도 스트레스를 덜 받고 많이 좋아졌죠.”
영화제 일러스트 작업을 많이 했지만 단행본이나 교과서에서도 이진아의 그림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어린이 책과 청소년 인문학 시리즈 삽화를 그리면서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많이 구상했다고 한다. 지금 준비 중인 단행본에도 어린이 책을 만들며 구상했던 실험적인 작업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준비 중인 신간이 ‘고양이 만화뿐 아니라 여러 가지 놀이 등이 결합된 그림책’이라고 귀띔했다. 그림의 밀도가 높아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출간되면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유형의 책이 될 듯하다. “지금 작업하는 책은 사실 제가 갖고 싶은 책이에요. 책을 열면 막 고양이들이 쏟아져 나오는듯한 그림책이었으면 합니다. 고양이의 느긋함과 엉뚱한 일화들을 보면서 웃을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습니다.”
긴꼬가 있는 집이 좋아서 웬만하면 밖에 나가지 않는다는 그는, 긴꼬가 아픈 소리를 내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떠난 후의 상황을 수없이 시뮬레이션해도 그 상실감은 지금으로써는 잘 상상할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은 지금의 시간을 충실히 함께했으면 한다. 긴꼬 다음에 또 다른 인연을 만들 수 있을까 싶지만, 자신한테 선택권은 없다 생각한다. 어떤 길고 양이가 자신을 간택한다면 그게 인연이라 믿기에.
<인디다큐페스티발2017> 현수막 앞에서 포즈를 취한 작가. 어떤 작업에든 고양이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CEDIT
글 사진 고경원
자료협조 이진아
에디터 이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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