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X
고양이와 잠들지 않아도 괜찮아
보통의 일상에 고양이를 더해보자.
묘하게 감칠맛이 돈다.
고양이와 ‘그 무엇’에 대한 시시콜콜한 필담.
유구한 불면의 역사
내 불면의 유구한 역사는 무려 초등학교 4학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부터 몰래 숨어 만화책을 보며 잠들지 않는 밤을 보내기 일쑤였던 노란 싹수의 초딩은 그대로 커서 싹수 없는 어른이 되고 만다. 본디 올빼미 체질인 탓도 있지만, 유난스러울 만큼 잠들기가 곤욕스러운 것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내게는 모든 날이 불면의 이유였다.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언짢으면 언짢은 대로... 수면은 늘 자연스럽지 않고 어려웠다. 불면증에도 가족력이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내 어머니 역시 밤이면 잠들지 못해 약까지 복용하던 중증 수면장애 환자였다.
이해는 고사하고 오해나 말아요
불면을 남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진작부터 포기했다. 김혜수와 한석규가 호연을 펼쳤던, <이층의 남자>라는 영화가 있다. 아직까지도 극장에서 본 것이 자랑스러운데, 작품성보다는 영화 속 ‘불면’을 다룬 한 장면 때문이다. 작중 불면증에 시달리는 김혜수에게 한석규는 “아침에 체조를 하면 불면증 따위 싹 사라질 것”이라고 묻지도 않은 조언을 던진다.
그 다음이 압권이다. 체조하면 잠 잘 온다는 한석규에게 김혜수는 “한국 남자들은 나이 처먹어가지고 아저씨 되면 아무한테나 조언하고 충고하고 그래도 되는 자격증 같은 게 국가에서 발급되나 봐?”라고 파르르 떨며 쏘아붙인다. 이 장면에서 나는 십만 수면장애 한국인 중 한 명으로서 혜수 언니에게 격하게 공감하며 내적 박수를 보냈다.(참고로 실제 김혜수 본인도 20년 째 불면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자책의 밤들
질 좋은 수면을 취하지 못하니, 늘 어딘가 피곤했다. 사실 지금도... 하지만 불면으로 비롯된 날카로운 성깔은 근 10년 사이에 제법 많이 누그러들었는데, 여러분이 짐작하다시피 그 원인은 고양이다. 고양이를 키우게 되면서 다사로운 온기를 나눠받아 불면증이 치유되었다는 동화적인 이야기는 아쉽게도 아니다. 다만, 잠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
새벽까지 뜬 눈으로 보내는 무수한 밤들이 편안하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적지 않은 밤을 어두운 자책 속에서 보냈다. ‘왜 나는 남들과 다를까’, ‘다들 자는 잠도 이렇게 힘들게 꾸역꾸역 자는 걸까’, ‘술 없이 잠이 오지 않는 나는 뭐가 문제인가’... 하지만 고양이를 키우고 나서는 불면의 밤이 더 이상 ‘별 것’이 되지 못했다.
잠들지 못해도 괜찮아
고양이들이야말로 ‘잠귀’가 귀신보다 더 밝다. 장담하는데 당신의 고양이 역시 방문이 닫히는 소리만 나도 귀를 쫑긋 세우고 일어날 것이다. 내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끈덕지게 매달린 불면이 지긋지긋해 몸이라도 뒤척이면 고양이들은 살그머니 일어나 머리를 들이밀며 골골댄다. ‘나 여기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야밤에 깨어있는 것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이렇게 큰 위안이 될 줄이야.
고양이들은 깨어있다가도 금방 다시 잠들고, 잠들어 있다가도 숨소리만 좀 크게 내도 금방 일어났다. 사실 고양이들이 밤에 쉬이 잠들지 않는 것은, 낮에 늘어지게 자두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좋다. 내가 잠들지 못하는 만큼, 그 보상을 고양이가 받는 것처럼 달게 쿨쿨 자주었으면 한다. 게다가, 낮에 자두어서 긴 밤을 함께 보내 준다면 감사할 일 아닌가. 잠들지 않아도 괜찮다. 불면의 밤도 더 이상 쓰디쓰지 않다. 내게는 고양이가 있으니까.
CREDIT
글·사진 이은혜
에디터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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