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IDE
길냥이를 돌보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월동 안내서
겨울의 길고양이에게 단 하나의 과제는 생존이다. 당신은 출근길에, 퇴근길에, 산책길에 얼어붙은 고양이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수도 없이 갖게 된다.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생존 키트를 구비해보자.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틀렸다. 다음 생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번생은 가망이 없다. 겨울이 오면 포차에서 기분 좋게 어묵 꼬치를 먹다가도, 퇴근 후 집고양이와 볼을 비비다가도 길 위의 꼬물이들에게 마음이 쓰여 문득 마음이 허해지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저 길을 걷다가 고양이와 비슷해 보이는 검은 비닐봉지만 봐도 황급히 가방을 뒤지며 고양이 캔을 찾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괜찮다. 다 괜찮다. 애묘인이면 다 한 번쯤 겪는 시련이다. 씁씁 후후 한번 하고 마음을 편하게 먹도록 하자. 어차피 당신은 이생에는 글렀으니. 차분히 숙명을 받아들이고 내 말을 잘 들어보시라. 이 생존 키트만 구비한다면 언제 어디서 고양이를 만나도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
01 가방
가볍고 튼튼한 것으로 고른다. 예상치 못한 고양이의 부비부비로 사료나 고양이 캔 내용물이 묻을 수 있으니 아끼는 가방은 피하자. 배낭이라면 열고 닫는 것이 용이하도록 옆에도 지퍼가 있는 것이 좋다.
02 보온병
길 위의 물은 모두 얼음이 되는 겨울. 그러나 수분 공급은 고양이 생존의 핵심이다. 깨끗한 물을 끓여 보온병에 넣고 다니자. 다른 마음씨 좋은 이가 두고 간 물을 발견한다면 그 위에 얼지 않도록 뜨거운 물을 부어주어도 좋다. 설탕을 조금 타면 어는 속도가 늦어진다.
03 건사료
선호도는 캔보다 낮지만 모든 것이 꽁꽁 어는 시기에는 건사료가 습식사료보다 늦게 언다. 사료를 뜨거운 물에 불려 동글동글하게 마는 경단 밥도 겨울철 길엄마 길아빠들의 선호 품목이다. 건사료는 은근히 냄새가 고약하므로 쓰지 않는 플라스틱 병이 있다면 그 안에 넣어서 뚜껑을 꼭 닫고 다니자. 나중에는 병 안에서 사료가 차카차카 흔들리는 소리에 쫑긋 귀를 기울이며 다가오는 고양이가 생길지도 모른다.
04 습식 캔
습식 캔은 소화가 빠르다. 구내염을 앓고 있는 길고양이들도 먹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겨울에는 보온병에 담긴 물을 타서 따뜻하게 섞어주면 더욱 좋다. 하지만 건사료에 비해 금방 얼기 때문에 바로 급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추천하지 않는다. 눈앞에 갑작스럽게 겨울 고양이를 보는 횡재를 누린다면 캔 따는 청량한 소리로 보답해보자.
05 핫팩
군인도, 고양이도 추울 땐 핫팩이 필요하다. 고양이를 냉큼 잡아다가 우리 집 전기장판 위에 모시면 제일 좋겠지만 여러 여건 상 장판길을 걷게 해줄 수 없으니 임시방편으로 핫팩만 한 것이 없다. 플라스틱 물그릇 아래쪽에 비닐을 한 겹 깔고 두면 물이 어는 것을 방지한다. 겨울이 오기 전부터 각종 소셜커머스에서 군용 핫팩을 대용량으로 판매한다. 사두면 나도 쓰고 고양이도 쓰고 종을 넘나드는 홍익인간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다만 고양이에게 조공할 때 저온화상에 유의하자.
06 수면양말
고양이에게 저온화상 없는 온기를 주고 싶다면 한 쪽만 남은 수면양말을 챙겨서 다니자. 수면양말 속에 핫팩을 넣어 묶으면 한나절 정도는 온기가 유지되는 간이 보일러 역할을 해준다. 겨울 내내 곁을 내주고 싶지만 나도 춥다. 심지어 내겐 오지도 않는다. 핫팩 넣은 수면양말이라도 껴안아주렴...
07 플라스틱 그릇
사료나 물을 담는 간이 밥그릇이 되어준다. 집에 플라스틱 밀폐용기가 없다면 전자렌지 즉석밥을 먹고 남은 용기도 훌륭한 그릇이 된다. 현대인은 플라스틱에 쌓여 살아간다. 집에서 사용한 플라스틱 용기를 씻어서 말려두는 습관을 기르자.
08 물티슈
고양이의 건식, 습식 사료는 특유의 비린내가 나는 경우가 있다. 고양이들에게 덜어준 뒤 깔끔하게 뒤처리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가끔 눈곱을 달고 나타나는 녀석의 얼굴을 보송하게 닦아주기도 한다. 다만 마음이 아주 너그러운 녀석이 아니면 하악질과 할큄을 선사할 수 있다는 점, 참고하시길.
CREDIT
에디터 이은혜
본 기사는 <매거진C>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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