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 안녕
뚱이와 가족의 탄생, 그리고 15년 후
2003년 7월, 나는 남편과 결혼한 후 곧장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꿈 많고 열정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뚱이는 그 해 10월에 입양했는데 그때 이미 생후 7,8개월쯤 되어 큼직했다. 알고 지내던 일본 유학생의 고양이가 뚱이의 엄마였다. 좀 더 말하자면 유학생이 미국으로 데려온 고양이가 미국 고양이 아빠를 만나 뚱이를 낳았다. 뚱이의 엄마는 흔한 삼색이 고양이었는데 아빠가 메인 쿤이었을 것이다. 삼색이 배에서 뜬금없이 우람한 자식 둘이 나왔는데 그 중 하나가 뚱이였다.
뚱이는 그 때 한 살도 안 됐지만 벌써 서너 번 파양을 당한 아픔이 있는 아이였다. 덩치도 남다르게 큰 데다 쓰레기통도 막 뒤집어 놓고 소리도 우렁차고… 여간 와일드한 게 아니었나 보다. 우린 부부였지만 이역만리 타국에서 외로움을 느꼈기에 뚱이의 넘치는 에너지는 오히려 바라던 것이었다.
유학 중에 뚱이는 소위 말하는 마당냥이, 정확히는 등산냥이었다. 집 뒤에 야트막한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뚱이는 거기를 자기 놀이터처럼 썼다. 아침에 우리가 등교할 때 뚱이는 배불리 사료를 먹고 우리와 함께 집밖으로 나와 산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나무도 타고 사냥도 하며 넓은 땅을 마음껏 뛰어다니다 오후가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 부부의 차 소리를 듣고 쪼르르 내려왔다. 그때 가끔씩 쥐를 잡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지금은 집이 좀 커졌지만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와 마련한 신혼집은 단칸방이었다. 미국에선 산을 타면서 뛰어다니던 뚱이를 좁은 집에 살게 하려니 마음이 많이 안 좋았다. 그래서 집 안에서 술래잡기 놀이를 참 많이 해줬다. 꼭꼭 숨어 있던 나를 뚱이는 용케 찾아냈고, 내가 ‘어!’ 소리 지르면 역할이 바뀌어 뚱이가 도망가는 식이었다. 불투명한 미래 앞에 불안한 시절이었지만, 작은 신혼집에서 우리 부부와 뚱이의 추억은 차곡차곡 쌓여 갔다.
뚱이와 우리 부부는 같이 늙어가고 있다. 한두 살 때는 호기심 넘치고 언제나 즐거웠던 뚱이. 지금은 피부나 털 상태도 안 좋아지고, 잠도 부쩍 늘어난 데다 장난감 레이저를 쏴도 눈으로 쓱 흘기고 만다. 뚱이의 나이는 열다섯. 그 숫자를 생각해보면 그건 곧 우리 가족의 역사이기도 했다. 뚱이가 기력을 점점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 가족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되어 짠한 마음이 든다.
고양이의 평균 수명을 꽉 채운 우리 뚱이. 하지만 아직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그리 와 닿지 않는다. 친정집 고양이 ‘꼬마’는 14살인데 고막에 염증이 심해 수술도 많이 받았고 백내장까지 걸렸다. 곧 죽을 것 같다. 하지만 뚱이는 이때까지 감기 한 번 앓지 않았다. 이가 안 좋아 가끔 토는 하지만, 언제나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가족을 든든하게 지켜줬다. 어렸을 때부터 야생에서 자라 튼튼한 데다 딱 보면 아시겠지만 타고난 골격도 남다른 걸. 나는 뚱이가 스무 살까지는 살아줄 거라 굳게 믿는다.
CREDIT
글 정현아
사진 곽성경
에디터 김기웅
본 기사는 <매거진C>에 게재되었습니다.
콘텐츠의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