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령화 가족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순돌이가 아직 길에서 생활할 때, 밥을 챙기는 일은 주로 내 몫이었지만 사정이 생기면 종종 엄마가 대신 하셨다. 순돌이와의 만남이 지속되며 엄마는 이름을 지어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때 이름은 ‘난이’였다.
난이는 오래 전 동네 고물상에서 키우던 개로, 내게 개껌을 사달라고 부탁해 직접 챙겨줄 정도로 엄마가 예뻐하던 녀석이다. 이후 엄마와 나는 밥을 주러 갈 때면 ‘난이’라 부르며 순돌이를 찾았다. 그럼 순돌이는 귀신같이 알아듣고 불쑥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하곤 했다.
순돌이가 가족이 된 후 본격적인 작명 고민이 시작됐다. 이름대로 산다는 말도 있으니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고, 집고양이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니 이왕이면 세련되고 멋진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평소 귀여운 동물 캐릭터를 좋아해 만화영화 속 고양잇과 동물 주인공 이름 몇 개를 염두에 두었다. 고운 외모를 자랑하는 밀림의 왕자 사자 레오, 라이언 킹의 용감한 사자 심바, 곰돌이 푸의 유쾌한 호랑이 친구 티거.
물망에 오른 이름으로 엄마와 엄선 작업에 들어갔으나, 경상도 분이신 엄마의 심각한 발음 왜곡 문제가 큰 걸림돌이었다. ‘레오’는 ‘네오’로 ‘심바’는 ‘신바’로 ‘티거’는 ‘치거’로 발음하시는 게 아닌가. 아무리 반복하여 알려 드려도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병원에서 순하다는 칭찬을 듣고 떠오르는 이름이 ‘순돌이’였다. 엄마도 정겹고 부르기 쉽다며 흔쾌히 좋다고 하셨다.
얼마 전 새 식구가 된 꽃비의 이름도 엄마의 혀끝에서 난항을 겪었다. 남편은 꽃비를 아가 때 데려왔고 성별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해 처음엔 암컷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꽃비’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엄마는 ‘꽃비’를 발음하는 걸 어려워하며 겨우 ‘뽀비’라 부르셨다. 급기야는 깜돌이도 깜식이도 아닌 ‘깜순이’라는 비약적인 개명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두 녀석은 순돌이와 깜순이라는 정겹고 구수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추운 날씨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엄마는 하루에도 수없이 두 녀석의 이름을 부른다. 격한 추격전과 레슬링으로 누구 하나라도 다칠까, 녀석들의 이름을 호통 치듯 부르는 것으로 말려 보려는 듯하다. 물론 녀석들의 재롱 앞에서는 세상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비록 이웃 개의 이름을 재활용하고 부르기 쉬운 촌스러운 이름으로 개명도 했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 한 구절처럼,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으로 엄마와 고양이들의 특별한 애착 관계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엄마 옆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뒹굴뒹굴 여유를 부리는 녀석들을 보면 추위를 맨몸으로 견디고 있을 길 위의 생명이 떠오른다. 더 많은 길위의 생명이 애정을 담은 이름을 선사받기를, 그리고 그 이름이 소중한 인연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 엄마 옆 아랫목에서 한없이 다정한 둘
| 오래 안아 주고 싶은 엄마와 얼른 벗어나고 싶은 고양이들
| 겨울이면 방 한가운데 순돌이를 위한 이불 동굴이 만들어진다.
| 말썽 궁리 중인 꽃비와 그런 꽃비가 걱정스러운 형아 순돌이
| 꽃비는 내 침대에서, 순돌이는 엄마 이부자리에서 사람처럼 잠이 들었다.
| 엄마 마중 나온 고양이들. 할머니, 어디 갔다 오셨냐옹?
CREDIT
글·사진 정서윤? | 작가
본 기사는 <매거진C>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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