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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만나기 위해 나타났다

  • 승인 2015-11-03 15: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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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너는 나를 만나기 위해 나타났다

그 고양이는 지난겨울의 어느 날 나타났다. 사람을 몹시 경계했지만 길고양이답지 않은 깨끗한 털에 아메리칸 숏헤어의 밝은 모색은 어쩔 수 없이 눈에 띄었다. 고양이가 빠르게 지나가는 길을 다들 한 번씩 흘깃 돌아봤다. 경계가 너무 심한 탓에 캣맘이 나눠주는 따뜻한 캔도 먹지 못하고, 밥 근처를 서성이다가도 기척이 느껴지면 도망가 버렸다. 한 걸음 다가와 닭가슴살 한 입 얻어먹기보다는, 두 걸음 도망가며 꼬리를 부풀리고 있는 고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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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길에서 지내고 있니?


이대 근처의 자그마한 가게는 길고양이 급식소를 겸하고 있었다. 구불구불 복잡하고 좁은 골목 사이로 몇 마리의 길고양이들이 밥을 먹으러 오곤 했다. 은오라고 이름 붙인 은색 고양이는 무서운 것이 많아서였는지 지레 다른 고양이들을 겁주고 위협하며 슬그머니 밥을 먹고 사라졌다. 은오는 이내 가게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캣맘이 어느 날인가 ‘내일 또 와’ 하며 말을 붙이자 가만히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가게에 하루에 몇 번이고 찾아왔다. 가게 안에 들어와 머무는 시간도 길어졌다. 언제 경계했느냐는 듯 손길을 느끼고 먼저 뽀뽀를 하기도 했다.

눈에 띄는 품종묘 길고양이, 원래는 사람과 함께 살던 것이 틀림없었다. 밥을 주며 돌보기는 하되 사람과 너무 친숙해지는 것을 우려하던 캣맘은 결국 은오에게 가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길 위까지 걸어오게 된 사연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길 위에서 또 말 못할 다른 사연을 만들어가고 있었으리라. 길에서 겁주며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던 탓인지 유독 남자를 무서워하고, 어느 날은 가게가 문 닫는 시간까지 가게를 나서지 않아 캣맘을 마음 아프게 하기도 했다. 수많은 유기묘들이 그렇듯, 묵직한 사연을 홀로 품고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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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품고 있던 고양이


은오에게 가족을 찾아주기로 결심했지만, 길고양이 성묘의 입양처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돌보던 길고양이를 고양이 별로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탓에 캣맘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길 위에서는 바로 내일의 일도 짐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은오의 배가 홀쭉해져서 나타났다. 왠지 살이 빠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출산을 한 것이었다. 은오는 여전히 매일 가게에 나타났지만 어디에선가 아기 고양이들의 수유를 하고 있었다. 험한 길 위에서 피어난 작은 생명들은 아름다운 축복인 동시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불꽃이었다.


내가 은오의 사연을 우연히 발견한 것은 그쯤이었다. 나도 이미 고양이를 키우고 있고, 둘째는 예정에 없던 일이었지만 묘연이라는 건 강력한 예감으로 찾아오고야 만다. 그녀에게 연락해, 아기 고양이들을 찾고 수유가 끝나면 은오를 입양하기로 했다. 아기들과 헤어지게 하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시간이 지나면 독립했을 아이들이니, 각자 좋은 가정을 찾아가는 것이 좋은 일이리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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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해야 하는 건 아닐까


가게를 찾아가 은오를 쓰다듬었다. <매거진C> 에디터로 수많은 묘연을 목격했던 것처럼, 나 역시 손끝의 촉감으로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예감대로 너는 내 고양이가 틀림없었다. 아기 고양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뒤섞인 길을 찾아 헤맨 끝에 운 좋게 아기 고양이들이 있는 곳도 발견했다. 건물 주인의 도움을 받아야 문을 열 수 있는 아주 작은 공터에 세 마리 아기 고양이들이 있었다. 꼬물이들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크고 건강해 보였다. 영문 모르는 아기들을 구조하기 위해 공터로 들어가 에어컨 실외기 아래로 손을 뻗었다. 아마추어 몇 명이 덤빈 탓에 여기저기 긁히고서야 간신히 두 마리를 이동장에 넣었지만 한 마리가 좁은 벽돌 틈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잡아챌 겨를도 없이 순식간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열어볼 수도 없는 벽 틈이라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혹시나 다시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괜한 생이별을 시킨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을 안고 며칠 밤을 기다렸다. 아이들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괜히 이산가족을 만든 건 아닌지… 포기하며 체념할 때쯤, 마지막 아기 고양이가 기적처럼 나타났다. 그렇게 은오와 세 마리 아기 고양이가 모두 품에 안겼다. 수유를 마친 은오는 우리 집에서 ‘아리’가 되어 묘생 2막을 시작하기로 했고, 세 마리 아기들은 입양 문의는 많았지만 결국 아이들을 구조한 캣맘의 가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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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의 과거는 궁금한 법


길에서 지낼 때에는 다른 고양이들을 많이 경계하거나 때리기도 했다는 은오는 집에 오자 너무나 예쁘게 적응했다. 처음에는 좀처럼 침대에 올라오려고 하지 않아서, 침실에 들어오지 않게 교육을 받았던 건 아닐까 했는데 어느새 잠을 자고 일어나면 이불 발치에 있었다. 알아서 좋을 것도 없는 남자친구의 옛 추억이 괜히 궁금한 것처럼 아리의 과거가 궁금했다. 왜 길고양이가 되어 있었을까, 그 전에는 어떤 집에서 살았을까, 그리고 너는 언제 태어났을까?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는 사연에 대한 물음표를 나는 쿨한 척하는 여자친구처럼 묻어야만 했다.

다만 아리의 묘생에 일어나는 앞으로의 일들은 내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나간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이 남은 시간은 온전히 내가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서로의 체온이 맞닿았을 때 느꼈던 것처럼, 너는 결국엔 나의 고양이가 되기 위해 나타난 것이 틀림없었다.



CREDIT

글·사진 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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