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언제나 그곳에
남양주 능내역
능내역엔 수많은 사람의 역사가 잠들어 있다. 철로 위로 아슬아슬 곡예 하듯 등교하던 순간과 친구들과 함께 떠난 기차여행, 두근대던 상경의 기억까지 전부……. 비록 폐역이 된 지금 더 이상 기차는 다니고 있지 않지만, 멈춰 버린 시간 속 추억의 조각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능내역은 오늘도 북적거리고 있다.
폐역에서 쉼터로
지난 50여 년간 여러 이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한 남양주의 한 간이역인 능내역. 세월이 지나고 근처에 새로운 선로가 놓이면서 하루 두세 대의 기차로 한적하게 운영되던 능내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비록 폐역화는 피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2012년 능내역을 살리기 위해 힘을 모은 마을 사람들 덕분에 능내역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번듯한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낡은 기차를 리모델링한 열차 카페와 지금은 운영하고 있지 않지만 추억의 사진관도 있어요. 옛날 교복을 입어보고 사진도 찍을 수 있는 공간이죠. 옛날 생각도 나고, 정겹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작년에 오셨던 분이 다음 해 또 오시고 그러기도 해요.”
황지영 씨는 3년 전부터 능내역의 관리를 맡고 있는 마을기업의 직원이다. 동절기엔 열차 카페도 매점도 문을 닫아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지지만 성수기가 시작되는 3월부턴 운영을 재개함은 물론 정기적으로 ‘7080 통기타 라이브 공연’도 열린다고 했다. 겨울인 지금, 드문드문 찾아오는 이들 사이로 새들의 지저귐만 나직하게 흐르는 능내역은 마치 겨울잠을 자는 것 같다. 하지만 곧 꽃이 피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면 이곳 능내역엔 과거를 추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터줏대감 고양이 능내
키도 모양도 제각각인 알록달록한 나무 의자 위엔 능내역을 찾은 사람들의 기념사진이 나란히 매달려 있었다. 기찻길을 거니는 장면, 연인과 마주 보는 모습 등 활짝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아 한참을 둘러보다 역 안으로 들어섰다. 아담한 역내엔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녹슨 난로와 초록빛 의자 그리고 파란색 아이스께끼 통이 정물화처럼 놓여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흑백 사진을 훑어보다 특별한 사진 한 장에 시선을 빼앗겼다. 말똥말똥 두 눈을 빛내는 새끼 고양이의 사진이다.
“능내역 터줏대감 고양이인 능내예요. 이건 어렸을 적 사진이고 지금은 엄청 커서 새끼 호랑이만 해졌어요(웃음). 원래 사진관 아저씨가 키우셨는데 사진관이 문을 닫고 난 뒤엔 제가 돌보고 있죠.”
3년 전부터 쭉 능내역을 지키고 있는 고양이 ‘능내’는 마을에서는 물론 능내역을 한 번이라도 방문했던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했다. 사진관에서 자란 덕분에 관광객이 들이대는 사진기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여느 고양이와 달리 사람들의 무릎에 턱턱 앉는 등 애교 넘치는 모습에 일부러 능내를 보러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고. 능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고양이용 참치캔이다. 수많은 관광객에게 아양을 피우고 간식을 얻어먹은 탓에 현재 거구를 자랑하는 돼냥이가 되어 버렸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모습도 동글동글 귀엽기만 하다.
“어휴, 여기서 더 찌면 안 되는데……. 그러면 나무에 못 올라가잖아요. 요 앞 들판에서 햇볕 쬐며 늘어지게 자는 게 얘 일과예요. 그리고 능내역 앞 의자 중에서도 가장 큰 탁자. 여기가 능내 전용 자리예요. 제일 좋아해요.”
능내역을 제 집 삼아 돌아다니며 관광객을 맞이하는 접대 고양이 능내. 사람을 좋아하고 태연히 몸을 맡기는 모습 탓에 웃지 못할 해프닝도 일어났었다고.
“어느 날은 한 4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부부가 능내를 안고 가더래요. 매점에서 일하는 분이 걔 데리고 어디 가냐니까 너무 귀여워서 집에서 키운다고……. 마침 발견해서 망정이지 그대로 못 볼 뻔했어요.”
세월이 흐른 현재, 능내는 여전히 귀엽지만 덩치가 커진 탓에 더 이상의 납치는 시도되지 않았다고 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고양이 능내지만 그래도 이 녀석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이곳 능내역이 아닐까 싶다.
위로가 되는 풍경
매일 최고 속도가 갱신되는 통신사 광고처럼, 빠르고 정신없는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능내역에 방문해 향수를 느끼고 사색도 하며 마음을 치유한다. 황지영 씨 역시 과거엔 청담동에 위치한 번듯한 직장에서 일했었다. 그녀에게 능내역 관리는 어찌 보면 지루할 수도 있는 업무 아닐까.
“그냥 이곳에 온 뒤론 소소한 일들이 다 재밌는 것 같아요. 원래 일하던 곳에서 너무 치이고 힘들었거든요. 능내역은 한적해서 확실히 스트레스를 덜 받아요. 자유롭기도 하고…….”
능내역의 주소 남양주시 조안면은 ‘새가 편안히 깃드는 곳’이라는 뜻을 가졌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시간이 느릿느릿 흐르는 곳.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능내역과 터줏대감 고양이 능내는 십년지기 친구처럼 변함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줄 것만 같다.
“오시는 분들에게 능내역이 마음을 편하게 풀어놓고 치유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돌아갈 시간이 되어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데 고양이 능내가 역 앞 풀숲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어쩐지 매일 반복될 평화로운 하루가 부러워져 자꾸만 뒤돌아보게 된다. 그들은 물론, 그들의 ‘변함없음’에 위로받을 모든 사람을 위해 능내역과 고양이 능내가 앞으로도 오래오래 행복하길. 그리고 돌아보면 언제나 그곳에 있길 기도한다.
CREDIT
글 이수빈
사진 박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