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네가 인간이라면
영화 <미노스>
어린 시절 책장에 꽂혀 있던 세계명작동화에는 참 신기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건, 개구리나 잉어 등 동물이 사람으로 변하는 이야기였다. 어느 나라의 동화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심지어 코끼리가 덩치 큰 사람으로 변하는 동화도 있었다. 영화 <미노스>는 그런 기억 속 동화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그것도 매력적인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하는 이야기를.
글 이대훈 일러스트레이션 육선영
부족하기만 한 기자 티브
이따금씩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만약에, 지금 내 곁에 있는 네가 사람이라면 어떨까. 어느 날 네가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 되어버린다면 우리는 더 친해지게 될까, 아님 틀어질까. 사람이 된 네가 고양이일 때의 습성을 몽땅 다 갖추고 있다면 말이다. 고양이인 지금처럼 날렵한 몸매와 꽃피는 애교, 게다가 놀라운 운동신경까지 모두. 아, 고양이 시절의 미모도 빼먹으면 안 되겠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달라질까?
이런 상상의 한 가지 답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빈센트 발 감독의 2001년 작 <미노스>가 바로 그 영화다. 마치 한 편의 동화를 읽는 듯한 네덜란드 영화 <미노스>에서는 사람이 된 암고양이 미노스와 신문기자 티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을 신문사의 기자 티브는 직업적으로 부족한 면이 많은 사람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뉴스’를 취재해 오는 것이 아니라 매번 취재해 오는 것은 고양이가 임신했느니 어쨌느니 하는, 말하자면 ‘쓸데없는 것들’ 뿐이다. 때문에 언제나 직장 상사로부터 꾸지람 듣기 일쑤.
그런 탓에 신문사를 그만둬야 할 위기에까지 처한 티브가 제대로 된 취재를 하지 못하는 데는 결정적인 이유가 한 가지 있다. 낯가림이 있는 성격이 바로 그것이다. 낯가림이 무척이나 심한 그는 뉴스거리의 취재 대상에게 쉽사리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당연히 뉴스 취재도 힘들다. 세상을 보는 눈 역시도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능력만큼이나 협소한 티브는 정말이지 기자로서 빵점이다.
하지만 기자라는 사회인으로서가 아니라 생활인으로서의 그를 평가해 보자면 그래도 꽤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살아가는 생활 반경 안의 사람들과의 관계는 보통 이상으로 좋은 티브다. 사실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데는 그렇게까지 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필요하지는 않을지 모른다. 다만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할 뿐. 그에게는 그런 사람들이 여럿 곁에 있다.
퍼즐조각처럼 딱 맞는 짝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완벽한 짝이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아마도 그건 내가 부족한 부분을 상대방이 채워주고, 상대방의 비어 있는 부분을 내가 채워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지 않을까. 마치 직소퍼즐처럼 들어간 곳과 나온 곳이 딱 들어맞는 사람 말이다. 티브에게 찾아온 미노스는 어쩌면 그의 완벽한 짝일지도 모른다.
공장에서 흘러나온 화학 약품을 잘못 먹어 사람이 되어버린 암고양이 미노스. 그녀(?)는 정어리 냄새에 홀려 한밤중에 들어간 집에서 티브와 조우하게 되고, 맛있는 정어리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는 그와 조금씩 친해져 간다.
고양이였던 그녀의 능력이 발현되는 것도 그와 만나고부터다. 미노스는 고양이였던 시절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신이 보았거나, 건물의 지붕 위 수많은 고양이들에게 들은 뉴스거리들을 티브에게 전해 준다. 밖을 잘 돌아다니지도 않고 그저 방 안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시답잖은 기사만 쓰는 그에게 이보다 더 잘 맞는 짝이 또 있을까?
미노스의 제보로 신문사의 인기 기자가 된 티브. 미노스는 어시스턴트라는 이름으로 그와의 한집 생활을 시작한다. 방 한구석의 상자에서 살면서 말이다.
네가 주는 수많은 것들
좁은 공간 안에서 누군가와 함께 생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이 가족인 경우에도 그렇고 정말 친했던 친구 사이에서도 그렇다. 함께 살면 서로 멀어지게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미노스와 티브와의 관계도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겉모습은 사람이지만 여전히 고양이의 습성이 남아 있는 그녀는 골칫거리가 되어 간다. 낮에는 잠을 자고 주로 밤에만 활동하는 미노스 때문에 티브는 신경 쇠약에 걸리기 직전이다. 길고양이였던지라 사람을 대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녀에게 심부름 하나 시키기도 어렵다. 게다가 생선 냄새만 맡으면 주변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곳으로 달려들기까지 하니, 그런 모습에 결국 티브의 인내심도 바닥나 버리고 만다.
하지만 미노스라고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고양이로서 타고난 본성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자신을 거두어준 티브인데 폐만 끼치는 것 같아 그녀 역시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와의 갈등이 계속 깊어지기만 하는 미노스에게 지붕 고양이들의 리더 회색 암고양이는 말한다. 티브의 집에서 나와 예전처럼 자유롭게 살라고. 고양이에게는 자유로운 생활이 더 어울리는 법이라고.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고양이와 자유롭기에는 제약이 너무나 많은 인간은 어쩌면 함께 사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인지도. 결국 미노스는 티브의 곁을 떠난다. 마지막 선물인 특종 기사 거리를 하나 남겨 두고서.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뒤, 자기 옆의 빈자리를 바라보던 티브는 그제야 자신에게 그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던지 깨닫는다. 그녀가 가져다 줬던 기사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네 고양이가 새끼를 무려 네 마리나 낳았다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던 기억, 고양이를 괴롭히는 악당을 그녀와 함께 물리치던 기억들……. 그런 기억들이 미노스가 남긴 소중한 선물이었다.
영화의 결말이 어떨지 한 번 짐작해 보겠는가? 힌트는 동화 같은 영화라는 것이다. 왕자와 공주가 만나 결국 결혼에 골인하는 동화처럼, 영화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