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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

  • 승인 2020-06-10 14: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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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랑 노 견 생 활 기
 당신이 잠든 사이에

전에는 꿈도 못 꿨던 많은 일을 이뿌니의 노화로 이제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주변에서 다 알아줄 정도로 거친 개였던 이뿌니는 나이가 드니 저절로 순해지고 말았다. 전에는 나를 제외한 누구도 이뿌니를 1분 이상 안아줄 수 없었지만 지금은 누구의 품에서도 으르릉거리지 않고 가만히 안겨있다. 그래야 한다는 제 고집도 잊은 걸까. 어쨌든 반겨야 할 일이다. 덕분에 요즘은 집에서 목욕도 한다. 최근에는 생애 최초로 미용도 시도해보았다. 정말로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순둥이와 여름나기
이뿌니의 배변 활동이 엉망진창이 된 건반년 정도가 되었다. 아무 데나 싸도 상관은 없지만 문제는 그것을 밟고 또 밟고 그발로 온 집안을 정처 없이 배회한다는 것이다. 이뿌니는 우리가 잠든 사이에 홀로 일어나 그렇게 자신만의 시간을 즐긴다.

당연히 수습은 우리의 몫, 이뿌니의 목욕은 그 때문에 시작되었다. 예전에 이뿌니는 한두 달에 한 번 샵에서만 목욕을 할 수있던 아이였는데 지금은 이틀에 한 번꼴로 응가를 밟으니 감당이 안 되어 우리는큰 용기를 내봤다. 욕실 바닥에 이뿌니를 세워두고 남편이 두 손으로 이뿌니를 붙잡아주면 나는 샤워기 호스를 들고 네 발 중 어느 발이 주범인가 하나씩 색출하는 데, 이때 시간을 지체하면 큰일 난다. 

영문도 모른 채 당하고 있던 이뿌니의 성질이 슬그머니 살아나기 때문이다. 순둥이 다된 것 같았던 노견이 아직 살아있다며 힘껏 아르르를 시전한다. 앞발은 반항이 심하지만 그래 봤자 2인 1조 부부 목욕 단을 이겨내진 못한다. 그렇게 발 씻기를 성공한 우리는 자신감이 생겼고 허리부터 가슴까지 차츰차츰 범위를 늘려갔다. 현재는 얼굴을 제외한 몸 전체 목욕이 가능하게 되었다. 똥 밟는 개가 이리 목욕비를 벌어주니 감사한 일이다.

순둥이 노견의 기적
여름이 시작되기 전 서늘하다 싶은 기온에도 체온조절이 잘 안 되는 이뿌니에겐 헐떡거림이 생겼다. 하지만 본격적 으로 에어컨에 의지하기엔 너무 이른 시기였다. 이뿌니의 체온을 어찌 내려줄까 고민하다가 털이라도 잘라줘야겠 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미용 이후 아직 노견을 받아주겠다는 미용실을 찾지 못했다. 10살만 넘어도 안 받아 주는 곳도 많다는데 18세 노견은 위험 부담이 크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저 털을 다 어쩐담. 자가 미용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우리 집엔 여태 미용기와 발톱 깎기조차 없었다. 나는 내 앞머리를 자르려 사둔 미용 가위 하나를 들고 이뿌니가 잠든 사이 엉덩이 털부터 쓱쓱 잘라보았다. 이뿌니가 세상 모르고 자길래 뒷다리까지 과감하게 가위를 들이댔다. 과연 이런 상태로 얘가 밖에 나가도 될까 싶을 정도로 털은 계단식으로 이상하게 잘렸다. 

이뿌니가 거울을 볼 수 있었다면 이게 뭐냐며 난동을 피우며 울었을 것이다. 잘라놓고 나니 솔직히 나도 약간 미안한 감은 있었는데 이뿌니가 조금이라도 더위를 이길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이뿌니가 깊은 잠에 빠질 때마다 가위를 꺼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뭣 모르고 자르느라 계단식 미용이 돼버렸지만 숱 가위를 이용하니 제법 털 모양이 다듬어졌다. 예쁜 털 모양까진 바라지 않고 그저 시원하게 자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단정해졌다. 오호라, 나에게도 이런 재능이? 숱 가위의 마법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뿌니가 잠들 때마다 조금씩, 보름 이상 걸려 몸통과 네 다리까지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믿어지지 않는 순둥이 노견의 기적. 물론 목욕 때와 마찬가지로 아직 얼굴은 건들 수 없지만 이게 어디냐 싶다. 이번 달에는 여기까지지만 곧 얼굴도 손댈 수있는 날도 올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이뿌니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너라서 가능한 지금
반면 전에는 하지 않았어도 될 일도 따라 생겼다. 요즘 이뿌니는 자꾸만 밥을 먹다 주저앉는다. 전에는 밥만 퍼주면 되었는데 지금은 뒷다리를 붙잡아 부축해줘야 한다. 고드름처럼 길게 늘어진 침을 닦아주는 일은 하루에 오십 번은 한다. 쉬가 마려울 땐 배변 판 앞까지 잘만 걸어갔던 전과 달리 조준이 매번 빗나간다. 그래서 이뿌니가 쉬할 때마다 밖으로 흐르진 않았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 자다 일어나 멍하니 멈춰 서 있는 이뿌니를 발견할 때면 여러번 이름을 불러 현실로 돌아오게 해주기도 한다. 혹여나 걷는 법을 잊은 건 아닐까 한 걸음씩 걸음을 유도해준다.

산책하러 나갔을 땐 내리막길로만 와다다다 내빼는 이뿌니를 연행해오거나 리드 줄로 묶어 둘 땐 1~2분 간격으로 다리에 꼬인 줄 풀어주기도 하는 일은 번번이 산책 중에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작년만 해도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놓고 가만히 앉아 이뿌니의 움직임을 눈으로만 쫓던 우아한 피크닉이 가능했는데 지금은 앉아서 커피 한잔 마시는 일도 사치가 되었다. 돗자리에 엉덩이를 붙일 시간 없이 계속해서 이뿌니를 주워와야만 한다. 내가 뭘 하든 낮잠 잘 시간엔 제 혼자서도 침대에 올라가 잘 자곤 했는데 지금은 내가 옆에 있어야만 잠을 자겠단다.

 이뿌니를 재워놓고 살금살금 주방으로 나와 내 할 일을 하려고 하면 어느샌가 잠에서 깬 이뿌니가 쪼르르 뒤따라 와있다. 그것도 무너지는 뒷다리를 하고선 내 옆에서 빙빙 돌고 있으니 모른 척할 수가 없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뿌 니를 다시 방으로 데리고 와야만 한다. 이뿌니가 잠들 때까지 곁을 지키는 일도 전에는 할 필요 없었던 일이다. 온종일 노견의 수발을 들기에 바쁘지만 지금 이 순간에만 할 수 있는 고된 즐거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치고 화가 날 때도 있지만 그 감정들도 사그라지고 나면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내가 이리 바쁜 것도 다 이뿌니가내 옆에 있어 줄 때나 가능한 일이니까.

CREDIT
글·사진 한진 
에디터 조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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