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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는 가을이라서

  • 승인 2020-06-10 14:4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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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횡성 풍산개

가을이는 가을이라서

속으로 ‘이름을 뭐라고 할까?’
하고 고민했던 것도 잠시,
곧바로 ‘가을이, 가을에 태어났잖아.’
라는 대답이 떠올랐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
푸르고 높은 하늘 아래 태어난
우리 가을이.

날도 어쩜 그렇게 예쁜 날을
골라 내게 왔는지 모르겠다.

풍산개 가을이, 태어나다
 

풍산개 여섯 마리가 태어났다.

청이의 부른 배를 보며 짐작은 했었지만 설마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이야.

청이는 고통스러운지 끙끙거리며 몸을 계속 뒤척였다. 이 모든 상황이 처음이라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무언가 깔아줄 만한 것이 없을까 집안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안 쓰는 침낭이 있었다. 청이는 신통하게도 침낭을 물어다 밖이 보이지 않도록 입구를 막더니 출산을 시작했다.

   

얼마 뒤 희미하게 끼잉 거리는 소리가 청이의 집 밖으로 새어 나왔다. 꼬물이들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초보 왕 엄마인 나는 덩달아 바빠졌다. 무언가 몸보신 시켜줄 만한 것이 없을까 냉장고와 찬장을 뒤졌더니 말린 북어와 미역이 나왔다. 일단 마른미역을 솥에 가득 넣고 푹푹 끓여 청이에게 주었다. 모자란가 싶어 사료도 조금 먹였는데 마저 삼키지 못하고 캑캑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한 마리도 아니고 여섯 마리씩이나. 얼마나 고생했을까? 미안한 마음 가득 담아 다음엔 북엇국을 끓여주기로 했다. 다행히도 새끼강아지들은 엄마를 닮아 모두 토실토실 건강했다. 눈도 못 뜨고 그저 낑낑거리며 엄마 젖만 찾는 꼬물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유난히 하늘이 높고 선선하던 10월의 어느 날, 나는 그렇게 가을이와 처음 만났다.

사고뭉치 여섯 악동들

꼬맹이들은 우리 가족과 엄마 청이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청이가 교육을 얼마나 잘 했는지, 꼬맹이들은 응가도 쉬야도 꼭 집 둘레에만 했다. 따로 교육하지도 않았는데도 의젓하게 ‘앉아’, ‘기다려’도 잘했다.

무엇보다 다들 순했다. 특히 꼬맹이들의 먹성은 알아줘야 했는데, 청이 주려고 끓여놓았던 미역국이나 닭죽까지도 그야말로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먹을 거면 몰래 먹던가, 꼭 국물을 몸과 마루에 온통 범벅을 하고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럼 혼내려고 마음먹었다가도 금세 사르르 녹아버리는 거였다.

딸아이도 새끼강아지가 귀여운지 무릎 위에 올려놓고 몇 번이고 쓰다듬곤 했다. 하얗고 통통한 새끼강아지들이 올망졸망 뭉쳐 다니며 먹고, 자고, 뛰어다니는 모습은 정말이지 사랑스러워 천사가 따로 없지 싶었다.

하루는 엄마 사료를 단체로 훔쳐먹다 내게 걸려서 견사 밖으로 내보냈더니, 벌 받는 줄도 모르고 신나서 사방팔방 뛰어다니다 이리 박고 저리 박고 난리도 아니었다. 꼬맹이들은 뭉쳐 다니며 산으로 들로 신나게 뛰어다녔다. 바람 부는 갈대밭이 온통 저들 놀이터였다.

어쩜 그렇게 신통방통하니, 가을아?
 
시간이 지나 가을이의 형제들은 모두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고 그중 가장 못난이(!)이던 한 녀석만 곁에 남았다. 그 못난이를 가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어렸을 적 가을이는 기특하게도 농원 안에서만 놀 뿐, 밖으로 나가 나를 걱정시키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좀 더 크자 걸핏하면 제집에서 탈출을 감행하더니 뻔뻔하게도 이 논두렁, 저 밭두렁을 구경 다니며 참견을 해 대는 거였다. 그러면서도 ‘가을아!’하고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쏜살같이 나타나 내 품에 안겼다. 땅굴은 또 어찌나 잘 파는지, 안으로 쏙 들어가 반대편에 있는 제가 봐 둔 전망 좋은 자리에 떡 
하니 앉아있곤 했다. 농원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그 자리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농사철에는 어쩔 수 없이 목줄을 매어두어야 했다. 순하고 착한 가을인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얌전히 있어주었다. 그 모습이 또 미안하고 안쓰러워 시간이 날 때마다 가을이와 시간을 보냈다.

가을이는 어릴 때 버릇 그대로 집 주변에서는 배변을 하지 않았다. 꼭 줄을 풀어주어야 농원 주변 풀밭에서 해결하곤 했다. 가을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랬다. 예쁘고 사랑스러워 도무지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조금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아들이 군에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농원 일은 언제나 산더미처럼 많았다. 마음속 어딘가에 작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지만 무기력을 느낄 틈조차 내겐 없었다.

지긋지긋한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자꾸만 자라나 나를 괴롭혔다. 몸도 예전 같지 않아 쉽게 피로해졌지만 그 모든 일을 나는 혼자 해내야 했다. 정신없이 풀을 뽑고 있으면 어느 순간 손의 감각은 희미해지고 계속 같은 일만 반복하는 기계가 된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여전히 높고 파래서 괜스레 야속한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가을이는 내게 다가왔다. 잠 덜 깬 부스스한 얼굴로 어슬렁거리다가 쓰다듬어 달라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 애교에 긴장이 풀린 나는 가을이와 함께 누워 하늘을 보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도대체 어찌 알고, 내가 힘들 때마다 다가오는 걸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가을인 그저 묵묵히 들어줄 뿐이다. 내게 있어 가을이는 행복 그 자체인 것 같다. 

힘들고 우울하다가도 가을이와 장난치고 웃고 떠들다 보면 작은 걱정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지친 일상 속에서 가을이 덕분에 나는 마음속 빈틈을 잠시나마 메울 수 있었다.

자꾸만 바라게 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어떤 사람들은 풍산개가 우리나라 토종 견종이자 호랑이도 잡는 용맹한 개이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저 가을이가 가을이라서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쫑긋 서는 세모 모양 귀도, 온 힘을 다해 흔드는 풍성한 꼬리도, 심지어는 사소한 사고를 칠 때까지도 모두 좋다.

요즘 들어 가을이와 해 보고 싶은 일들이 하나둘씩 자꾸만 떠오른다. 먼저 자동차를 무서워하는 가을이와 함께 여행을 가 보고 싶고, 그게 안 되면 올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이라도 가서 신나게 놀고 싶다.

최근 집에 들인 또 다른 풍산개, 풍산이와 가을이 둘의 새끼를 보고 싶은 욕심도 조금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을이가 건강하게 지금처럼만 내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장 크다.

그저 햇볕이 내리쬐는 농원에서 땀을 닦으며 가을이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더운 여름날 시원한 마루에 누워 살을 맞대고 함께 설핏 낮잠을 자는 달콤한 시간이, 그렇게 가을이와 보내는 매 순간순간들이 언제까지나 이어졌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CREDIT
글 사진 이채현
에디터 이혜수



<강원도 횡성 풍산개-가을이는 가을이라서>
해당 글은 MAGAZINE P 2019년 8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은 (주)펫앤스토리에 귀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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