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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C. 혈연이 아니어도, 내가 택한 가족

  • 승인 2020-06-12 15: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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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줄리아 카메론은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에서 글이란 마음을 담
고 치유하는 그릇과 같다고 설파한다. 그는 남편인 마틴 스코세지 감독의 불륜으로 이혼
하면서 얻은 고통과 분노를 씻어내는 수단으로 글을 썼고, 그 안에서 무한한 치유력을 발
견했다. 그러고 보면 좋은 글이란 미려한 문장이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글
이 아닐까. 몸과 마음의 고통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냈지만,《고양이 순살탱》을 출간하며
내면의 치유를 경험한 김주란 작가에게서 그 치유의 힘을 다시 본다.

김주란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은 2017년 5월이었다. 야옹서가의 첫 책 《히끄네 집》 출간을 앞두고 이신
아 작가와 초고 자료를 함께 정리하러 갔던 제주 출장길에, 그 일대의 고양이 명소들을 돌아보고 귀경
하던 참이었다. 빡빡한 일정으로 고단했지만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김주란 작가
였다. 그와 연락하게 된 건,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스치듯 본 살구라는 고양이의 사진 때문이었다.

▲한쪽 눈으로도 더없이 예쁜 표정으로 세상을 보는 둘째 살구


한쪽 눈이 없는 고양이, 살구

살구는 어렸을 때 한쪽 눈을 잃은 채 종이박스에 담겨 버려졌다가 작가에게 입양됐다. 하지만 첫날부터 첫째 순구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를 차지하는가 하면, 비장애묘인 순구와 싸워도 지는 법이 없을 만큼 당당했다. 게다가 남은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보는 동그란 얼굴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이전 게시물을 거슬러 올라가 보호소 시절의 살구 사진을 보니, 작가가 얼마나 큰 사랑으로 살구를 돌봤는지 뚜렷하게 보였다. 성묘 입양과 더불어 장애묘 입양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줄 작가를 찾고 있었기에, 김주란 작가를 꼭 만 나고 싶었다.

그는 “한 번도 제대로 글을 써 본 적 없는데 책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망설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마음을 끌었다. 전문 작가의 글을 받아서 책으로 만드는 건 쉽다. 그러 나 그보다는, 서툴고 어설픈 ‘초보 집사’ 시절을 거치며 지금도 꾸준히 고양이에 대해 배울 자세를 갖춘 평범한 사람의
글이 더 큰 공감대를 불러올 수 있다고 믿었다.

▲순살탱 셋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작가

작가와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보니, 순구와 살구의 귀여운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던 작가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작가는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오랜 기간 힘든 시절을 보냈고, 온 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픈데도 딱히 치료법이 없는 섬유근통증후군이란 난치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사그러들지 않는 몸과 마음의 고통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순구와 살구가 주는 평안이 있기에 하루하루를 견
딜 수 있었노라고 했다. 아픔이 있는 고양이를 인간이 구원하는 것뿐 아니라, 아픔을 간직한 사람의 마음을 고양이가 치유하는 이야기도 함께 담고 싶었기에 흔쾌히 계약을 제안 했고, 2년간에 걸친 집필이 시작됐다.

고양이 사진 일기도 작품이 된다

흔히 고양이가 등장하는 작품 사진이라고 하면 세계의 풍광 좋은 장소를 찾아가, 자유롭게 놀고 있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담는 것을 상상한다. 물론 그런 고양이들만 모은 작품 사진도 멋있지만, 평범한 반려인이 가장 자주 보고 사진 찍을 수 있는 대상은 바로 곁에 있는 반려묘다.

자칫하면 흔한 스냅사진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을 집고양이 사진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애정과 시간이다. 마음을 다해 오랜 기간 고양이의 생로병사를 기록한 사진은 그 자체만으로 소
중한 가족의 역사가 된다. 다행히 작가는 첫 고양이 순구를 만난 순간부터 거의 매일같이 사진을 찍었고, 모든 사진들이 중요한 시기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 이후에도 꾸준히 고양이들 사진을 찍은 것은 물론이다. 특히 매일 올리는 인스타그램 글은 《고양이 순살탱》의 소중한 씨앗이 되었다.

▲엄마 껌딱지 노릇을 충실히 하는 셋째 탱구

작가의 첫 고양이는 펫숍에서 데려온 순구였다. 고양이를 하나도 몰랐던 시절, 한번 구경만 해 보려고 들렀던 길이었지만,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하얀 새끼 고양이에게 연민을 느껴 충동적으로 데려왔다고 했다. 링웜에 칼리시, 허피스바이러스까지 감염되어 있던 순구는 첫날부터 아팠다. 펫숍에 연락을 때 “문 제가 있으면 교환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그제야 생명을 상품처럼 거래하는 펫숍의 현실을 직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작가는 ‘고양이 공부’를 시작한다. 동물단체 에서 왜 “사지 말고 입양하라”고 말하는지도 알게 되고, 순구 의 납작한 코와 짧은 꼬리가 스코티시폴드 간의 동종교배에서 흔히 발견되는 유전질환의 징후 중 하나라는 것도 깨닫는다.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타자의 아픔을 이해한다

둘째인 살구를 보호소에서 데려온 것도, 이미 다 큰 고양이인 데다가 한쪽 눈까지 잃어서인지 오랜 기간 입양되지 않았던 살구에게 가족을 만들어주고 싶어서였다. 작가는 점잖고 순한 순구와 매일 장난치고 싶은 살구-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두 고양이를 키우며 생명의 다양성을 알게 되었고, 고 양이들 덕분에 매일 웃을 일이 생겨 힘든 투병 생활도 견딜 수 있었다. 선천적으로 안구가 형성되지 않아 한 번도 세상을 본 적 없는 탱구를 셋째로 입양한 것도, 시각장애가 있는 살구를 키우며 공부한 경험이 탱구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였다. 놀라운 것은,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탱구가 뛰어난 기억력과 청각을 활용해 온 집 안을 누비고 다닌다는 점이었다.

장애를 이겨내고 명랑쾌활하게 살아가는 살구와 탱구를 보며, 작가 역시 알게 모르게 삶의 의지를 배웠는지도 모른다. 고양이는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그저 존재하는것만으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일까. 고양이 출판사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다양한 고양이의 사 연을 접했지만, 살구와 탱구의 사랑스럽고 당찬 모습은 “고양이 출판사를 시작하길 잘했어”라고 되뇌게 만들었다. 어쩌면 묻힐 뻔했을 지도 모르는 이들의 귀한 이야기를 책으로 널리 알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세 고양이를 애
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사랑스러운 모습을 포착해, 매일 같이 사진으로 보여준 작가의 힘이 가장 크겠지만.

▲좀처럼 단체샷을 찍기 힘든 순살탱 세 고양이가 함께한 장면을 어렵게 찍어 보았다.

고양이가 가르쳐준 큰 사랑

부모님도 동생도 있었지만 늘 외로웠던 작가에겐, 순살탱 세 마리 고양이가 피를 나눈 가족보다 더 깊은 유대감으로 맺어진 가족이 되어주었다. 고양이에 대한 사랑은 이웃한 다른 생명에 대한 관심과 애정
으로 이어졌다. 제주에 유독 많은 유기견과 들개를 보면 마음 아파하고, 집 앞에 찾아오는 길고양이에
게도 급식소를 열어 매일 밥을 챙겨주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주란 작가의 첫 책 《고양이 순살탱》
은 고양이라는 존재가 한 인간을 얼마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산 증거가
아닐 수 없다.

한국 고양이의 날 11주년 행사가 열린 지난 9월 9일, 서울에서 작가를 다시 만났다. ‘물범친구’라는
별명으로 익숙한 남편과 함께였다. 세 고양이가 준 사랑으로 충만한 작가의 표정은 한결 밝아져 있었
다. 작가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길에, 오랫 동안 숙제처럼 미뤄둔 작업인 내 첫 고양이, 스밀라
에 대한 책을 하루빨리 완성하고 싶어졌다. 이제 열 다섯 살인 스밀라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
로, 이 이야기의 끝을 스밀라가 없는 장면으로 매듭 고 싶지 않아서. 좋은 작가는 읽는 이의 마음을 움
직이고 행동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김주란 작가 역시 내가 만난 ‘좋은 작가’ 중 하나로 오래 마음
속에 자리매김할 듯하다.
 

CREDIT
글 고경원
사진 김주란

<아틀리에의 고양이 - 혈연이 아니어도, 내가 택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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