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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P. 시간의 속도

  • 승인 2021-02-08 10: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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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전, 남편의 손바닥만큼 작았던 릴케는
이제 내가 들어올리면 버거울 정도로 커버렸다.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릴케를 볼 때면, ‘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말을 실감하곤 한다.

NEVER SAY NEVER AGAIN!

  남편은 독일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개들과 함께 성장했지만, 나는 반려견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유학 시절 강아지 털 알레르기가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강아지를 더욱 멀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내가 릴케를 키우게 될 것이라고는 당연히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당시에 나는 ‘다시는 ~하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래서 릴케를 키우기 전까지 ‘나는 절대로 반려견을 키우지 않을 거야’라고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하지만 릴케를 키우게 된 뒤로는 어떤 상황에서든 “Never say never again!” 이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릴케의 산책 철학

  릴케가 다니던 강아지 학교와 링 트레이닝 수업은 다 문을 닫았다. 대신 우리 부부는 릴케와 함께 주말마다 산책을 나가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상생활을 많이 바꾸어놓기는 했지만 독일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는 편이다. 단, 세 사람 이상이 함께 만나는 것을 금지하고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은 가능하면 피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그래서 서로 멀찍이 떨어져 걸어야만 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강아지끼리는 인사하고 상대편 개의 엉덩이 냄새까지 맡을 수 있다. 

  그럴 때 릴케는 금방이라도 친해지려고 할 것처럼 다른 강아지의 엉덩이 냄새를 맡는데, 그렇게 냄새를 맡고는 유유히 가던 길을 갈 때가 있다. 마치 그 정도면 자신은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부부에게는 살가운 릴케가 막상 다른 강아지에게 무심하게 구는 모습을 볼 때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이유가 왜인지는 몰라도 릴케의 그런 산책 철학은 언제나 우리를 웃게 한다.

불청객의 때이른 방문

  ‘4월의 날씨’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독일의 4월은 변화무쌍하다. 하루에 모든 날씨를 경험할 때도 있다. 해가 났다가 비가 오고, 우박과 눈이 동시에 내릴 때도 있다. 하지만 올해의 날씨는 유난히 해가 자주 비추고 건조했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릴케와 함께 산이나 강가로 많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귀찮은 일도 생겼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일찍 나타난 진드기 때문이다. 산책 후에 릴케의 온몸을 살피고 빗질을 하는 것도 필수 일과가 됐다. 불청객의 때 이른 등장으로 정말 오랜만에 선물 받은 진드기 퇴치 기구를 꺼냈다. 이 달에만 벌써 네 번이나 릴케의 몸에서 진드기를 발견했으니 진드기 퇴치 기구의 효과는 톡톡히 본 셈이다.

릴케의 ‘델리카테센’

  내가 사는 동네에는 조금만 차를 타고 나가면 개들의 섬이 있다. 루르강을 끼고 빙 둘러 있는 개들의 섬은 릴케가 특히 좋아하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모든 개가 목줄을 풀고 자유롭게 뛰놀며 강가에서 물놀이도 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보통 섬에 갈 때는 자가용을 타고 가지만 가끔 지하철을 타고 갈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마지막 정거장에서 내려 섬까지 걸어가곤 한다. 걸어가다 보면 종종 말을 볼 수 있는데 릴케는 바로 그 길에 있는 말똥을 좋아한다. 말똥만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릴케의 모습은 마치 독일식 수제 햄인 델리카테센을 좋아하는 독일인을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말똥을 릴케의 델리카테센이라고 부른다. 

  우리 눈엔 여전히 아기 같은 모습의 릴케지만, 사람 나이로는 어엿한 18살이 된다. 이제 말똥보다는 암컷에게 더 관심을 보이는 나이이다. 평소에는 순하고 말 잘 듣던 릴케지만 산책을 하다 암컷 강아지를 만나기라도 하면 부리나케 달아나곤 한다. 우리 부부는 벌써 성견이 된 릴케에게 앞으로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다. 

  모든 생명의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은 유난히 빨리 흐르고, 지루한 일을 붙들고 있을 때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 부부의 삶 한가운데에 나타난 릴케는 우리를 따뜻한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지난 1년 동안의 시간을 떠올리면, 수많은 기억 중에서도 릴케와 함께했던 기억은 훨씬 선명하게 떠오른다. 릴케 또한 우리 부부와 함께하는 시간이 언제나 평화롭고 따스한, 요즘 날씨 같기만을 바란다.

글.사진 이영남
에디터  한소원

해당 글은 MAGAZINE P 2020년 6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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