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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P. 질풍노도의 시기

  • 승인 2021-04-29 10: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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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rm und Drang

질풍노도의 시기를 의미하는 독일어다.

우리 가족의 숙제

  유행 바이러스로 인한 독일의 상황은 최근에서야 조금 나아졌지만, 릴케는 여전히 강아지 학교와 링 트레이닝 수업에 못 나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계속 집에만 있어야 하는 릴케를 위해 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중이다. 

  우리는 매일 두 시간 이상 산책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강에 간다. 루르강에 갈 때면 나는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릴케가 수영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한다. 즐거워하는 릴케를 바라보는 것뿐이지만 나까지 더불어 행복해지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릴케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 웃음으로 가득했던 건 아니었다. 우리에게도 눈앞이 아찔해지는 순간이 당연히 있었다.

  릴케가 어렸을 때, 우리 부부는 매일 아침 릴케를 집 정원에 데려갔다. 눈곱도 안 떼고 한 일은 다름 아닌 릴케의 배변 훈련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 부부가 아침 식전이나 식후에 현관문을 열어 놓으면, 릴케가 나가서 스스로 볼일을 본 뒤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은 남편이 출근하기 전에 릴케의 산책 겸 볼일 해결을 위해 집 주변 공원에 데리고 나가기도 했
다. 덕분에 우리 부부의 아침 시간은 조금 더 여유로워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큰일은 거의 지나간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배변 훈련보다 더 큰 과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릴케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무사히 넘기는 것이었다.

책임감의 무게

  동물병원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집 주변 공원을 지나가고 있던 와중에 릴케가 갑자기 혼자 달려나가 버렸다. 하네스 줄을 잡고 있던 나는 힘없이 넘어졌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젊은 학생 커플이 재빨리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갈 수 있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왼팔을 움직일 때마다 불편함을 겪고 있다. 물론 릴케는 우리 부부에게 커다란 기쁨을 선사해주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릴케가 우리 부부를 속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런 아픔 또한 가족이기에 인내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숲에서 여름 나기

  독일의 여름은 그야말로 초록색 식물이 무성한 계절이다. 남부 지역에는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라는 끝도 없이 펼쳐지는 울창한 숲이 있다. 독일어로 슈바르츠(Schwarz)는 ‘검은’, 발트(Wald)는 ‘숲’을 뜻하는데, 나무들이 지나치게 많은 나머지 언뜻 보면 숲이 검게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
다. 

  사실 릴케에게 숲은 더없이 반가운 산책 장소지만, 진드기 천국이기도 하다. 참고로 필자가 사는 동네에는 슈바르츠발트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않게 큰 숲이 있다. 그래서 숲 산책을 다녀오는 날이면 나는 릴케를 꼭 붙잡고, 털 속에 숨어있는 진드기를 골라내야 한다. 심지어 심한 날에는 열다섯 마리의 진드기를 한꺼번에 골라낸 적도 있었다. 

  나의 지인들은 대부분 반려견에게 진드기 퇴치용 약을 먹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아직 릴케에게 약 대신 진드기 퇴치에 유용한 코코넛 기름을 발라주거나, 음식에 소량의 코코넛 기름을 넣어서 먹이는 방식으로 대체하고 있다.

한창 가출할 나이

  중성화를 아직 하지 않은 릴케는 무려 세 번이나 집을 나간 적이 있다. 릴케가 처음 집을 나갔을 때는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행히도 우리 동네에 ‘쿠이커혼제’라는 견종은 릴케와 피고밖에 없었고, 덕분에 릴케는 지인의 눈에 띄어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두 번이나 릴케의 가출을 직접 목격했는데, 당시 나는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릴케가 그렇게 돌연 뛰쳐나간 이유가 다름 아닌 암컷의 냄새였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평소에 내가 문을 열어 놓아도 릴케는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본능 앞에서 속수무책인 동물을 내가 어떻게 하랴. 사실 같은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중성화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아주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릴케를 중성화시키지 않기로 했다. 여러모로 힘든 시기이지만 릴케가 그저 지금 시기를 우리와 함께 잘 극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글.사진 이영남
에디터  한소원

해당 글은 MAGAZINE P 2020년 8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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