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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P. 우리집에는 시간여행자가 산다

  • 승인 2021-04-30 10:4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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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는 두 살 때 우리 집에 왔다. 그때 우리 딸은 여섯 살이었다. 어린 딸이 있다는 이유로 크리스를 입양할 때 남들보다 더 많은 확인을 거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아이와 개를 함께 기르는 데엔 생각지 못한 여러 어려움이 따를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니까 나는 어쩌면, 남들보다 조금은 어려운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장과 변화

  크리스와 딸, 둘 다 정말 어렸다. 어느덧 크리스는 여섯 살이 되었고, 딸 아이는 무려 10살이 되어 10대 청소년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인생을 통틀어 서로 함께했던 시간이 그렇지 않았던 시간보다 훨씬 긴 셈이다. 그래서인지 둘의 사이는 정말로 각별하다. 나 역시 ‘아들딸이 하나씩 있다’고 주위에 말하고 다닐 만큼, 크리스는 이제 정말 우리 가족의 일원이다.

  어린아이 둘의 육아를 동시에 하고 있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둘의 성장 속도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딸은 혼자서 머리를 감을 수 있게 되었고, 자전거를 탈 수도 있게 되었다. 또 최근엔 온라인 수업을 혼자서 들을 수 있을 만큼 컴퓨터도 잘 다루게 되었다. 

  코로나 덕분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요즈음 딸과 함께 옛날 영화를 자주 보고 있는데, 최근에는 「시간여행자의 아내」라는 영화를 봤다. 시간여행자의 운명을 지닌 남자 ‘헨리’가 평범한 여자인 ‘클레어’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영화였다.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불규칙하게 넘나들며 사는 헨리는 문득 자신이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알게 된다. 하지만 클레어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헨리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결혼도 하고 딸도 낳아 기르는, 시간과 운명을 거스르는 감동적인 사랑에 대한 영화였다. 

  자신보다 먼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남자를 계속 사랑하는 클레어. 뜬금없이 크리스가 떠올랐다. 딸이 이런 심오한 내용의 영화를 함께 볼 수 있을 만큼 자라는 동안, 크리스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왔을까?

  한 발자국도 디디기 어려워했던 크리스는 이제 산책을 꽤나 좋아하게 됐고,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다른 개들을 무서워하는 모습 역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런 건 성격의 변화였을 뿐이고 크리스가 ‘성장’을 이룬 것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가 바쁠 때면 가끔은 크리스 스스로 산책을 다녀오거나, 목욕을 혼자 한다거나, 아니면 “이제는 미용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병원 예약 좀 잡아줘.” 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됐다는 식의 성장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상상인 것이다.

후회없이 사랑하기 위해

  크리스는 독립할 수 없다. 나는 크리스의 평생 동안 끼니마다 밥과 물을 챙겨줘야 할 테고, 제때 산책과 목욕, 그리고 미용까지 시켜줘야 할 것이다. 심지어 크리스의 건강까지도 내가 항상 걱정하며 챙겨야 한다. 크리스가 노견이 되어갈수록 나의 몫은 점점 더 늘어갈 것이다. 이것은 개를 입양하려고 마음 먹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내가 크리스를 입양하려고 했을 때, 이미 반려견과 함께 살고 있던 지인이 이런 충고를 해줬다. “개 키우는 거, 약간 애기 키우는 거랑 비슷해.” 한창 육아 때문에 피눈물 나게 힘들던 시절이었는데도 솔직히 그 말이 전혀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지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나는 딸을 사랑하지만, 언젠가 딸은 내게서 독립할 것이다. 그렇기에 흔히들 자식은 ‘키워 떠나보내는 존재’라고 한다. 하지만 개는 다르다. 크리스는 딸처럼 ‘키워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내 품에서 지켜줘야 하는 존재다. 

  하나는 점점 자라고, 하나는 오히려 작아진다. 요즘은 길에서 유모차에 노견을 태워 바람을 쐬어주는 반려인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어린아이 육아를 이미 끝낸 나도 크리스로 인해, 미래에는 다시 유모차를 끌게 될 것이다. 

내 사랑을 포기하기에는

  다시 「시간여행자의 아내」로 돌아와 보자. 극 중에서 클레어가 헨리와 결혼을 결심했을 때, 그녀의 지인들은 고생길이 훤하다며 결혼을 말린다. 딸이 5살이 될 무렵 남편이 죽음을 맞이하는 충격적인 미래. 하지만 그때 클레어는 이렇게 말한다. 

  “내 사랑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었어.”

  반려견을 잃은 많은 이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다시는 강아지 안 키운다’는 말이다. 그 짧은 문장에 담긴 슬픔이 얼마나 클지를 알기에 마음이 아프다. 또한 나 역시도 언젠가 그 슬픔을 마주해야만 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기에는, 그리고 크리스를 입양한 것을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함께 하는 행복이,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반려인들이 시간여행자의 가족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먼 훗날을 미리 걱정하지 말자. 지금 이 순간, 후회 없이 사랑하자.

글.사진 최소희
에디터  이혜수

해당 글은 MAGAZINE P 2020년 8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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