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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C. 전생 엿보기

  • 승인 2021-05-12 10: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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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부터 쏟아지던 비가 그친 것 같다. 시선을 밖으로 옮겼다. 미대생이 유화물감을 쏟기라도 했는지 거리의 색감이 짙고 선명하다. 전봇대의 주황 불빛이 방안으로 새어 들어온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그 위에서 하맹이가 평온하게 잠들어 있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향하고 있다.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 지금이다. 과거로 갈 기회다. 지금부터 난 유튜브를 통해 나의 전생을 들여다볼 것이다. 

과거를 들여다보다

  얼마 전 카페에 친구가 왔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던 중 친구는 나에게 ‘유튜브로 전생 체험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해 줬다. 나는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순간 속으로 나는 ‘한번 해 봐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바로 오늘이다. 직감한 나는 유튜브 검색창에 ‘전생 체험’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그리고 개중 조회 수가 가장 높은 동영상을 눌렀다. 영상에서 시키는 데로 눈꺼풀에 힘을 풀고 천천히 눈을 감았고, 심호흡을 여러 번 반복했다. 10분쯤 호흡을 하며 몸을 이완시키는 데 집중하니 신기하게 정신이 몽롱해졌다. 

  현실과 꿈의 중간 정도의 단계에 들어선 것 같았다. 무튼 지금은 방 안에 있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봤다. 맨발이 보였고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옮기자 나는 내가 넓은 초원 한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른 아침인지 하늘은 회색빛이었고 풀 내음이 진동하며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잠시 뒤 멀리서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맹이가 아닌

  “목소리가 당신을 전생으로 인도할 겁니다.” 

  유튜버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가 시키는 데로 초원을 걷다 보니 동굴 앞에 다다랐다. 동굴로 들어가기 전 유튜버는 ‘당신을 인도해 줄 동물을 상상하세요’라고 말했다. 하맹이를 떠올릴지, 아니면 전에 키웠던 까만 강아지를 생각할지 고민했다. 전생으로 가는 거니 현생에 있는 하맹이보다 과거에 키웠던 까만 강아지를 떠올리는 게 나은 선택인 것 같았다. 

  잠시 뒤 눈앞에 검은 형체가 보였다. 강아지와 함께 동굴에 들어갔다. 저 멀리 티끌만 한 불빛이 보였다. 강아지와 함께 더디게 커지는 불빛을 향해 하염없이 걸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한껏 커다래진 불빛이 꽤나 눈이 부셨다. 눈이 시려 미간을 찡그리려고 할 때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빛을 향해 나가면 전생의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나는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빛을 향해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리에 무언가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되돌아오다

  눈을 떴다. 이마에 희미하게 누군가의 체온이 느껴졌다. 전생에 돌입한 건지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주황 불빛이 도는 방안이 보인다. 창밖 건물 모서리에 맺힌 굵은 물방울이 벽을 타고 하나가 되어 바닥으로 천천히 떨어진다. 

  내 방이다. 냉장고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하맹이가 보이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니 하맹이는 침대 끝에 앉아 날 노려보고 있다. 내가 저 대신 전에 키우던 검은 강아지를 떠올린 걸 추궁하는 듯한 눈빛이다. 하맹이는 내 이마를 후려친 앞발을 혀로 몇 번 핥고 다시 나를 보며 눈을 깜박인다. 아마도 이런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현생에나 집중하며 살아.” 

글.사진 양세호
에디터  이혜수

해당 글은 MAGAZINE C 2020년 9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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